허민호 / 문화연구학과 박사과정

 지젝은 놀라운 철학자다. 쉴새없이 글을 써내는 필력이 놀랍고, 프랑스 혁명과 오바마 정부를 연결시키고 칸트와 헤겔을 거쳐 빌 게이츠에 다가가는 사유의 폭도 놀랍다.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오지랖이다. 그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헐리우드 영화부터 사소한 정치적 사건까지 그의 분석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런데 그의 편집증적이고 강박적인 분석이 단순한 오지랖은 아닌 듯하다. 지젝이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건들이 그의 사유망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사건들이 있고, 그것을 분석하면서 그의 사유망이 형성되어 간다. 그렇다면 그가 분석하고 있는 사건들은 무엇인가. 요컨대 그것은 파국으로 향하는 사건들이다.

이 책의 제목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비극적 역사가 나중에 희극으로 반복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마르쿠제의 말을 빌려 강조하고 있듯 희극의 외피를 쓴 반복이 원래의 비극보다도 더 끔찍한 파국으로의 초대일 수 있다는 의미다. 명백한 파국으로의 노정임에도 우리는 그 파국을 인식할 수 없다. 2008년 금융붕괴가 우리에게 “예측 불가능한 놀라운 사건”으로 인식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현실의 위기를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발생한 위기도 대처가능한 것으로 둔갑시킨다. 현재의 위기에서 지배이데올로기의 중심과제는 붕괴의 책임을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느슨한 법적 규제나 거대 금융기관의 타락 등 부차적인 것으로 돌리는 서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데올로기는 또 얼마나 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그래서 지젝은 외친다. “멍청아, 그건 이데올로기야” 이 말에는 한치의 과장도 없다. 그 외침은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지젝이 감지하고 있는 어떤 절박함이다.

그렇다면 이 혼잡한 이데올로기와 결부되어 있는 파국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지젝이 이책 다음으로 쓴 책이 바로 <종말의 시대에서  살아가기> 이다). 지젝은 여기서 다시 공산주의를 해답으로 내놓는다. 그러나 그에게 그것은 위기의 해결책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문제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지젝은 공산주의라는 이념에 충실하기만 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말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이 이념에 실천적 긴박함을 부여하는 적대를 역사적 현실 안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그는 네 가지의 적대―생태적 파국, 지적재산과 관련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새로운 기술과학적 발전의 함의, 그리고 새로운 장벽(Walls, 월가)의 생성―를 언급한다.

이 중 네 번째 적대(배제된 자와 포함된 자를 가르는 간극)가 핵심적이다. 이 네 번째 적대가 없다면 생태학은 지속가능한 발전의 문제로, 지적재산권은 복잡한 법률적 사안으로, 유전자공학은 윤리적 쟁점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직 배제된 자와 관련해서만 공산주의라는 용어의 사용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을 ‘배제된 자’라는 개념으로 대체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의 폐기가 아니라 유지이며, “마르크스의 상상력을 뛰어 넘어” 그 개념을 실존적 차원으로 진화시키기 위한 도약이다. 그리고 지젝에게는 그것이 마르크스를 보다 마르크스적인 방식으로 사유하는 과정이다.

이 책은 21세기에 쓰인 ‘공산당 선언’이다. 이 책은 현재의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지만, 동시에 비판이며 선언이기도 하다. 지젝은 공산주의 이념이 오늘날 여전히 적실한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곤경이 공산주의 이념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보이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조금 나아 보이는 개혁된, 개선된 새로운 자본주의(사회주의!)에 손쉽게 타협하지 말고 공산주의로 시작하라고 독려한다. 비록 실패할 운명일지라도 “출발점으로 돌아가”라고. 지젝은 베케트의 입을 빌어 말한다.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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