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애 / 세종대 초빙교수

발터 베냐민은 현대의 매체 미학에서 선구자의 위치를 차지한다. 매체가 인간의 지각 및 사유방식을 결정한다고 갈파한 맥루언의 사상적 뿌리가 베냐민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고, 사진과 관련해 베냐민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력을 언급하고 있는 플루서를 봐도 역시 그렇다. 이처럼 현대의 매체 이론가들은 베냐민의 통찰에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진이나 영화와 같은 아날로그 매체만 경험했던 베냐민의 한계가 거론되기도 한다.

가상과 실재의 이분법이 소멸됐다고 생각하는 현대의 디지털 매체 이론가들에게 베냐민은 모방 개념을 통해 여전히 가상과 실재의 관계를 고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디지털 코드가 전통적인 서구의 존재론, 인식론, 해석학의 전복을 가져왔다고 믿는 매체이론가들은 베냐민의 테제들이 새로운 매체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결론짓기도 한다. 이 밖에도 베냐민의 매체이론은 기술낙관주의 혹은 기술결정론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이는 베냐민 스스로 자초한 면이 없지 않다.

‘피카소의 그림 앞에서는 보수적 태도를 취하는 관객이 채플린 영화 앞에서는 진보적 태도를 보인다’는 서술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한 이유는 기술 매체가 선험적으로 인간의 지각양식을 규정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기술적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수용태도가 얼마든지 조장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베냐민의 매체이론을 대변하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1934)은 파시즘 문화정책에 대한 비판보다는 인간의 지각과 미디어의 관계를 선구적으로 인식한 미디어 이론의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아우라 상실의 시대

베냐민은 당대의 문화정치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쓴 위의 텍스트에서 현대사회의 변화된 인간의 지각양식을 아우라의 소멸로 설명한다. 아우라는 예술생산 및 수용방식 뿐 아니라 현대사회의 생산방식, 교통, 정보체계, 도시화 등에 의해 소멸되는 전통적 경험양식과 관련있다. 아우라의 소멸에 대한 베냐민의 주장은 현대사회가 인간의 지각에 부과한 과제를 더 이상 주체의 관조적 태도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보는 시각을 내포한다.

기술매체가 지각구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근대철학에서 상정한 개인의 주체의식이 강력한 의문에 부딪혔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진이나 영화 수용자의 태도를 설명하는 산만함, 감촉성, 충격 등의 개념들은 더 이상 세계에 대한 일정한 관점과 입장을 통해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개인적 의식 주체와는 부합하지 않는다.

지각이론의 측면에서 베냐민의 매체이론은 일견 탈인간화, 탈주체화를 선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도입하고 있는 ‘시각적 무의식’의 개념은 시각적 경험이 더 이상 인간의 시지각이 아니라 확대, 축소, 순간촬영 등 카메라 렌즈의 기계적 인지구조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카메라의 시각에 의해 비로소 가시화된 세계를 탈인간화된 세계라고 부르는 이유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자아나 의미의 틀을 통해 바라보던 세계와는 전적으로 다른 세계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의 탈인간화는 인간을 기술매체의 종속변수로 보는 키틀러의 입장과는 다르다. 문화의 중심을 인간에서 미디어 기술로 완전히 옮겨놓음으로써 인간중심주의에 결별을 고한 키틀러의 급진적 주장과 달리 베냐민의 매체이론은 인간의 종말을 외치지는 않는다. 궁극적으로 매체는 인간과 자연의 모방적 관계를 형성하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인간 모방능력의 연장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사물의 가상에 근거한 마술적 교감과는 다른 방식의 모방을 기술적으로 실현시키면서 세계에 대한 시·공간적 관계가 인간중심적 시각을 떠나 기술에 내재한 형식들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카메라가 인간을 배제한 기술적 모방을 실현시킨다고 해서 기술 이전의 인간적 모방능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고도의 기술로 만들어진 이미지가 관찰자에게 신비체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베냐민의 또 다른 통찰이 이를 암시한다.

집단적 환몽을 깨는 근대적 주체의식

결국 베냐민의 매체이론은 디지털 코드 경험이 부재한 아날로그 시대의 산물이라는 지적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다. 베냐민의 매체이론이 근대적 주체와는 다른 새로운 인간학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이 근대적 주체 개념을 완전히 전복시킬 정도의 탈주체를 주장하고 있지는 않다. 초현실주의에 대한 글에서 베냐민이 제시한 ‘인간학적 유물론’이라는 독특한 개념도 이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 개념은 카메라에 의해 열린 ‘시각적 무의식의 공간’이 어떠한 인간학적·정치적 함의를 내포하는지 설명해준다.

정통 맑시즘과는 상당한 거리를 가지고 있는 베냐민의 인간학적 유물론은 정신, 관념, 도덕의 차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자연적 피조물로서의 동물성을 지니는 동시에 정치적 결단의 집단적 주체로서의 인간 개념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에 따르면 사진이나 영화와 같은 기술매체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신체적으로 감응하는 도취와 각성을 동시에 불러올 수 있다. 그것은 더 이상 개인적 의식의 차원이 아니라 집단적 신체감응의 차원에서 일어난다. 베냐민은 새로운 기술매체가 만들어낸 이미지 공간이 대중에게 미치는 강한 흡인력을 인식하고 이를 집단적 환몽이라고 불렀다.

그는 기술매체의 수용자로서 대중이 근대적 의식주체와는 다른 지각양식을 지닌다고 보았지만, 이러한 대중에게 집단적 환몽으로 깨어나는 혁명적 의식을 기대함으로써 근대적 주체 개념에 내포된 역사의식과 정치의식을 구제해내고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이 남는다. 매체와 정치, 매체의 역사철학을 포함하는 이른바 통합학문적 베냐민의 매체이론에서 우리는 무엇을 구제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단지 지각이론의 관점에서만 베냐민의 매체이론을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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