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우 / 중앙대 강사 (문화연구)

 

 

 

 

 

 

 

 

 

 

 

 

■알렉스 캘리니코스(Alex Callinicos, 1950~)

캘리니코스의 입장에서 ‘레닌 재장전’이란 새삼스러운 표어일 것이다. 총알이 다 해서 탄창을 갈아 끼우는 게 재장전이라면, 그에게 ‘레닌’이라는 총알은 항상 장전중이기 때문이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중앙위원이자, 요크셔 대학의 정치학 교수이기도 한 그에게 레닌은 한 번도 매장당한 적이 없다. 이점에서 레닌 재장전에 관한 논의가 그에게는 레닌의 부활을 더욱 가속시킬만한 반가운 기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도 인정하듯이 레닌에 관한 논의가 부활하게 된 데에는 슬라보예 지젝의 공이 크다. 지젝이 레닌의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키게 된 계기는 현 반자본주의 진영이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는 데 따른 혹독한 결과를 회피하는 경향과 관련이 있다. 지젝은 좌파 사회주의가 전지구적 자본주의에는 반대하지만 권력 장악이라는 부담스러운 과업을 회피하고 차라리 야당으로 남고자 한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악순환의 고리에 사로잡힌 히스테리성 열정의 희생자”라는 것이다. 반면 레닌은 책임 있는 정치를 이끌어갔다. “진정한 보수주의자처럼 진정한 레닌주의자도 행위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의 정치적 프로젝트를 실행한 결과가 유쾌하지 않을 때도 기꺼이 책임지는 것이다.” 이렇게 지젝에 의해서 레닌은 결과에 책임지고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는 실천가의 모범으로 포스트모던의 담론 안에 재등장한다. 이에 대한 캘리니코스의 비판 요지는 ‘재등장’시킨 공은 인정하지만 그러한 재등장의 방식이 너무도 많은 위험을 동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과에 대한 책임의 강조가 빠질 수 있는 큰 위험은 신념의 윤리보다는 책임의 윤리를 강조했던 막스 베버의 논의로 전락할 가능성이다. 가치판단의 문제를 사실판단의 문제와 분리했던 베버는 가치 즉, 윤리의 문제를 또 다시 신념의 영역과 책임의 영역으로 구분했다.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정치>(1919)에서 비판했던 신념의 윤리란 “낭만적 흥분에 도취해 있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떠벌이들”의 가치로서, 당시의 시대적 맥락으로 볼 때 볼셰비키와 스파르타쿠스단의 ‘해악적 아마추어리즘’을 지칭한다. 요즘말로 “All or Nothing”에 해당하는 “완전무결한 원리를 실현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현실 정치가라면 불가피하게 “모든 폭력에 숨어 있는 악마적 힘”과 타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실과 가치를 구분하고 가치 있는 행동을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 평가할 때 사실과 가치 사이에는 엄청난 심연이 존재하게 된다. 캘리니코스에 따르면 이는 “사실과 가치를 신칸트주의적으로 분류하겠다는 구상에 기반하며 (중략)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과 인간의 행동을 주관하는 목표 사이를 갈라놓는다.” 하지만 사실과 가치, 이론과 행동이 이런 식으로 분리될 때 이 둘 사이의 도약에는 어떤 규범도 적용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역사(진리)는 어떻게 전개되든 정치(윤리)가 보이지 않는 어떤 이익을 위해 자의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정당화된다.

결과와 정당화의 덫

베버와 같은 종류의 책임 정치론과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유사성을 끊어내면서 캘리니코스는 레닌주의 정치학의 특징을 이론과 윤리, 두 방향으로 소개한다. 먼저 정치학에서 이론의 지위이다. 레닌은 “엄청나게 다급한 환경에서조차 이론과 실천 사이의 끊임없는 진동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해 한발 뒤로 물러서 상황을 이론적으로 재검토했다.” 진동이란 가령 이런 것이다. 역사는 경제원리 같은 단순한 원리로 환원될 수 없는 복잡한 요인들이 우연히 결합하여 진행되기 때문에(알튀세는 이를 중층결정론이라고 칭했다) 예측 불가능하다. 레닌은 이런 순간마다 기존 이론의 허를 찌르는 역사적 사실의 등장을 인정하고 그러한 전환을 야기하는 상황의 근본적인 개략적 형세를 확정했다. 말하자면 비록 사후적이지만 “정치 상황은 분석으로 드러나는 결정적 구조를 가진다.” 다음으로 향후 전개의 예측은 한 가지 이상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최상의 분석을 바탕으로 개입하는 혁명가들의 실천은 오직 개입함으로써 “자신들의 분석이 맞는지 틀린지 알 수 있으며” “어떤 결과가 우세할지는 부분적으로 혁명가들 자신의 행동에 달려 있다.”

우리는 캘리니코스의 분석으로부터 ‘이론’이 ‘사실’에 의해서 생성되고 교정되는 적어도 두 가지 계기를 발견한다. 하나는 불쑥 튀어나오는 사건의 등장으로 기존 해석의 불일치가 강제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단 해보고”(나폴레옹의 금언이다) 이후의 전개과정을 지켜 볼 때만 그 진위를 알 수 있는 검증의 계기다.

결과에 대한 뚝심 있는 책임의식으로 실천가 레닌을 조명할 때 우리가 놓치기 쉬운 두 번째 부분은 여기서 도대체 ‘결과’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이다. 캘리니코스는 트로츠키조차도 결과(END)의 두 가지 의미를 혼동했음을 지적하면서 이 단어에 ‘어떤 행동의 실제적 결과’라는 의미와 ‘행동을 하면서 품는 기획’의 의미가 혼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두 가지 가운데 어떤 의미로든 결과와 관련지어 현재의 실천을 평가하는 논의(결정론)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결과를 실제 결과로 이해했을 때는 가령 “레지스탕스 편에 가담해서 싸운 사람들이 단지 이기는 쪽을 우연히 선택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우스꽝스러운 평가방식이 나타난다. 이런 오류의 압권은 메를로-퐁티가 <휴머니즘과 폭력>(1947)에서 보인 모스크바 재판에 대한 “세련되고 약아빠진” 변명이다. 나치 독일과 대적하는 시점에서 소련을 약화시키는 부하린 같은 스탈린 반대파의 입장은 ‘결과적’으로 반혁명적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지젝이 강조했던 것은 현 시점에서 우리 행동을 정당화해줄지 모르는 결과주의가  아니라 그 결과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다. 행동이 수행되는 의도, 권력의 의미를 충분히 인지한 후 이뤄지는 행위로서의 정치가 지젝이 레닌에 기대어 강조한 주장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캘리니코스는 “행위자가 올바른 정신 상태라면 그 행동결과도 비판에서 면제된다는 얘기일까.”라고 반문한다. 지젝의 결정론에 따른다면 스탈린조차도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다. 스탈린은 농민을 몰락시키고 테러 지배와 수용소 군도의 운영 같은 ‘혁명을 방어하는 불쾌한’ 조치를 수행함에 있어 누구보다도 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논의의 처음으로

5년 전 반자본주의를 주제로 한 캘리니코스의 방한 강연을 들었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마지막 그의 당부였다. “학생 여러분, 너무 이론에만 치중하지 마시고 실천을 하세요.” 당시에는 실천적 개입에 대한 강조 정도로 들렸지만 요즘과 같은 포스트모던한 정세에서 그 말은 재의미화된다. ‘진리’, ‘윤리’, ‘책임’ 같은 추상적 개념들의 적합한 배열 속에서 뭔가 해답이 나오리라 기대하는 발상에는 한계가 있으며 레닌의 최고 미덕은 바로 구체성에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논의의 범주는 차라리 현실 ‘분석’과 ‘방향’ 설정, 정치적 실천의 ‘방법’ 등으로 재조정되어야 한다. 가령 분석의 측면에서 레닌은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경제사상가”가 아니었다. <제국주의>론은 독창적인 저서가 아니라 대중화를 위한 개설서였다. 레닌의 기여는 1차대전의 발발과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로 야기된 뜻밖의 상황에서 선진국의 노동계급과 식민계급의 민족 해방 운동 사이의 반제국주의 동맹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한 데 있다. 방향에서 “현 시기에 사슬 전체를 거머쥘 가능성을 가장 많이 가진 핵심고리”를 강조한 레닌의 언급은 유명하다. 또한 정치적 중심조직이 없을 때는 아무리 역동적인 대중운동도 실패함을 베트남전 반대 운동의 예가 보여준다. 캘리니코스의 논의는 레닌 재평가 논의가 갖는 그 메타적 수준의 불모성을 메타적으로 논증하는 내재적 비판의 성격을 띈다. 논의 내용이 아니라 논의의 추상수준에서 잘못되었기에 이를 구체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것이 그의 논의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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