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 이화여대 HK연구교수

    1998년, 런던 국립극장에서는 <코펜하겐>이란 제목의 연극이 초연됐다. 이후 600회 이상 상연된 마이클 페인의 이 작품은 1941년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두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만나서 나눈 이야기에 중심을 두고 있다. 55세의 닐스 보어와 39세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전쟁이 한창이던 그 시절에 “과학자들이 원자폭탄 연구를 해야 하는가”와 관련된 논쟁을 벌이면서 과거의 기억이 지니는 근원적인 불확실성과 미래에 다가올 사건들의 필연성 사이의 진지한 차이를 드러낸다. 닐스 보어의 아내 마르그레테 보어의 “하이젠베르크는 왜 코펜하겐에 갔을까?”라는 물음으로 시작되는 이 연극은 역사와 사회 속에 살아가는 과학자의 양심문제와 더불어 인간의 인식 속에 내재한 근본적인 불확실성의 문제를 난해하지만 흥미로운 방식으로 제기한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첫 만남은 하이젠베르크가 1922년 ‘보어 축제’에 찾아감으로써 이뤄졌다. 이후 하이젠베르크는 1924년 9월부터 9개월 동안 코펜하겐에서 보어와 함께 연구를 진행하면서, 양자역학의 기본이 되는 아이디어들을 예리하게 다듬기 시작했다. 양자역학의 효시가 된 <삼인작>(1925)과 그에 앞서 발표된 하이젠베르크의 논문에서는 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주고받은 생각들이 뚜렷이 드러난다. 1927년 하이젠베르크는 26살에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에 최연소 정교수로 부임하게 되는데, 바로 그 해에 불확정성 원리에 관한 논문이 발표된다. 

불확정성 혹은 미결정성


    마이클 페인의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불확실성(uncertainty)’이다. 이 용어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에 등장한다. 지금도 불확정성 원리는 양자역학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로 자리 잡고 있다. 양자역학이 세계에 대한 인식에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말할 때 자주 언급되는 것이 바로 이 불확정성 원리이다. 가령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동시에 원하는 정밀도로 측정할 수 없음을 원리적인 수준에서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 흔히 말하는 불확정성 원리의 내용이다. 운동량은 위치를 변하게 만드는 것과 관련되는데, 고전적으로는 무겁고 빠를수록 운동량이 커진다. 그러나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이는 흔히 다음과 같은 식으로 해석된다. 위치를 매우 정확히 측정하여 위치의 불확정성을 매우 작게 하면 그만큼 운동량의 불확정성이 커지기 때문에, 운동량에 대해서는 원하는 정도의 정밀도를 얻을 수 없다. 반대로 운동량을 매우 정확히 측정하여 운동량의 불확정성을 매우 작게 하면 그만큼 위치의 불확정성이 커지기 때문에, 위치에 대해서는 원하는 정도의 정밀도를 얻을 수 없다. 물리학이라는 것이 물리량을 정확히 측정하고 그를 기반으로 물리량들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학문이라면, 이와 같이 어떤 물체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런데 ‘불확정성 원리’라는 이름은 물리학, 특히 양자이론의 이해에 상당한 오해를 일으켜왔다. 무엇보다 ‘불확정성’이라는 용어에 문제가 있다. 영어권에서 사용되는 ‘불확실성(uncertainty)’이라는 용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확실하지 않은(not certain) 것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소위 ‘불확정성 원리’는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양자역학과 같은 물리학에 불확실한 지식이 본질적으로 내재한다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1960년대 미국의 뉴에이지 운동과 관련하여, 불확실함에 관련된 관념들이 양자역학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들이 널리 퍼졌으며 지금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 자신은 주관적 색채가 강한 ‘불확실성’이라는 용어를 거의 쓰지 않고, 대신에 ‘부정확성’이나 ‘예리하지 않음’과 같은 용어를 사용했다. 더 적절한 용어는 ‘미결정성(indeterminacy)’이다.


    또한 불확정성 원리는 ‘원리’가 아니다. 원리는 특정의 이론체계에 국한되어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이론체계에 대해 보편적으로 성립한다고 믿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리가 적용되는 영역이 이론체계가 적용되는 영역보다 더 넓기 때문에, 원리는 이론체계가 구성되는 것을 인도하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아직 양자역학이 충실한 형식이론을 갖추지 못했을 무렵에는 고전역학과 구분하여 양자역학만의 독특한 주장을 이해할 수 있는 인도원리가 필요했으며, 초기 양자역학에서 불확정성 ‘원리’는 그런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제안한 직후, 이는 힐베르트 공간에 바탕을 둔 양자역학의 형식이론에서 유도되는 하나의 수학적 정리에 지나지 않음이 밝혀졌다. 그런 점에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원리가 아니라 더 큰 양자역학의 체계에서 엄밀하게 유도되는 정리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지식의 불확실성의 문제와는 직접 관련되지 않는 이론적 테두리로서 이론의 한계를 보여줄 뿐이다.

닐스 보어와 코펜하겐 해석


    불확정성 원리는 ‘코펜하겐 해석’이라는 확장된 해석의 한 축으로 자리잡으면서 명실 공히 양자이론의 핵심이 되었다. 양자역학은 처음부터 여러 사람의 마음을 괴롭혔다. 올바른 물리학은 추상적이고 수학적인 형식이론을 넘어서는 직관적이고 일상적인 관념에 근거해 한다는 것이 지배적인 생각이었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그다지 자연스럽거나 편안하지 않았던 양자역학은 탄생 때부터 모두가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이론이 아니었던 것이다.


    1927년 이탈리아 코모에서 열린 학회에서 보어는 “양자 가설과 원자이론의 최근의 전개”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양자역학이 이제까지의 물리적 개념을 전혀 새롭게 재정식화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 해 브뤼셀에서 열린 제5회 솔베이 회의나 1930년의 제6회 솔베이 회의에서도 양자역학의 기초에 관한 논쟁은 매우 뜨거웠다. 보어는 이 논쟁의 대부분에서 자신이 코모 강연에서 제창했던 상보성 개념에 기초를 둔 양자역학의 해석을 당시의 물리학자들이 받아들이게끔 설득하는 데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를 통해 보어가 주로 활동했던 덴마크의 수도를 따서 ‘코펜하겐 해석’이란 용어가 만들어졌다. 최근에는 코펜하겐 해석과 보어의 해석을 구분해야 한다는 지적이 자주 나오고 있지만, 코펜하겐 해석은 가장 영향력이 큰 양자역학 해석으로 자리를 잡았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만남은 양자역학이라는 근원적으로 새로운 이론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인식의 불확실함과 존재에 대한 모호함이라는 철학적 논쟁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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