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20.10.9 금 13:00
기획학술
미디어가 삼켜버린 인간의 스마트함과 인간의 조건이영주 /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책임연구원
천선영 편집위원  |  gmlssjrnf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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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호]
승인 2010.09.29  14:4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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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미디어 관련 담론들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스마트한 미디어를 경배하기 바쁘다. 신문이나 텔레비전과 같은 기존 미디어도 자신을 신상품으로 변신시켜 줄 것 같은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에 미래를 위탁할 방법을 찾느라 분주하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를 두고 애플과 삼성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술과 시장 경쟁은 단순한 기업 경쟁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스마트’한 미디어가 만들어가는 세상과 인간의 소통양식을 놓고 전개되고 있으며, 6·70년대 다소 흥분된 반응을 출현시키고 잠시 역사의 뒤로 사라졌던 맥루언을 다시 호출하고 있다.

우리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전자미디어 체계가 인간의 일상을 감싸고 거대한 자본이 미디어 기술 제국을 만들 것이라는 전망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있었고, 이때마다 ‘맥루언 르네상스’라고 불릴 정도로 맥루언의 미디어 사상을 다시 읽고 토론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의 이론은 특정한 사회문화적 풍경들을 해독하려는 다른 이론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공명을 만들어냈으며,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토론 주제들을 제공하고 있다. 
                                    스마트 미디어 숭배와 맥루언을 잘못 활용하는 사람들

 

맥루언에게 미디어는 인간의 심리적·사회적 경험들을 바꾸어놓는 콘텍스트이자 새로운 감각 비율과 지각의 형식을 창조하는 환경이다. 각각의 미디어가 창조하는 새로운 경험과 인지방식의 변환은 프로그램 콘텐츠와 무관하게 이용자에게서 발생한다. 맥루언이 전화나 만화, 텔레비전과 같은 쿨미디어(상대적으로 적은 정보량, 이용자의 감각적 참여를 더 많이 요구)와 라디오와 사진, 영화와 같은 핫미디어(상대적으로 많은 정보량, 이용자의 참여를 적게 요구)를 구분하는 것도 미디어에 대한 그의 새로운 정의방식에 근거한다.

맥루언은 분명 미디어생태학자(media-ecologist)다. 미디어생태학이 미디어와 기술의 사회·문화·심리적 영향력에 주목하면서 미디어가 정치·경제·사회 조직들을 포함한 개인이나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것이라면, 그는 분명 여기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미디어생태학이 미디어의 기술과 형식, 그리고 이에 기초한 총체적인 커뮤니케이션 체계가 사회·문화의 변화와 관련된 것이라는 그의 이론은 우리에게 미디어생태학의 기초를 놓아준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폭넓은 미디어생태학자로서 맥루언이 아닌, 인용하고 활용하기에 편리한 몇 가지 명제나 진술들을 뚝 잘라내 자기들 편한 방식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미디어 기술이 신세계를 창조할 것이라고 소리치는 미디어 기업과 자본이며,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미디어 기술결정주의에 기초한 정부와 일부 학자들이다. 맥루언의 진술이나 ‘지구촌’에 담긴 생각들은 인터넷이나 모바일 미디어를 ‘사회/사교 미디어(social media)’라는 용어로 포장시키는데 활용된다. 텔레비전과 같은 전자미디어 앞에 모여 앉아 있는 수천만 혹은 수 억 이상의 사람들의 모습이 압제적인 가르침과 통제를 행하는 과거 부족사회의 모습과 닮았다는 그의 진술이 어떻게, 언제 어디서나 모든 단말기를 통해 정보에 접속할 수 있다는 ‘유비쿼터스 시대’의 용어로 활용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비판적 미디어생태학 추구하기

풍요로운 미디어 시대라고 하지만, 오히려 지금 우리는 문화의 쇠락과 정치의 소멸을 경험하고 있다. 미디어는 정보를 관리하고 여론을 동요시키는 권력을 통제받지 않고 이용할 뿐만 아니라 국가와 자본의 선전과 여론경영의 수단으로 재봉건화됐다. 정치는 상품으로 포장되며 실재적인 것들은 지워지고 하이퍼리얼리티한 것들로 대체됐다. 이미지와 디지털 코드, 컴퓨터 모델에 의해 창조되는 하이퍼리얼리티들은 재현의 죽음(그리고 곧 대표의 죽음)을 가져왔다. 비릴리오의 말처럼, 우리는 과감하게 미디어가 진리에 이르는 효과적인 방식이라는 생각이나 정보의 취급이 객관적이라는 생각, 더 나아가 우리 삶의 필수요소라는 생각으로부터 조금씩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현대의 상업 미디어가 끊임없이 대량적으로 쏟아내고 있는 연출된 정보와 가짜 오락거리들 사이에서 문화와 정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가 얼마나 더 의미있는 것으로 간주될지 의문이다. 또한 지금의 거대하고도 촘촘한 미디어 기술과 정보 생태계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신체활동을 미디어 내부로 집중시키는 우리들이 과연 진정 쾌락의 상태를 경험할 수 있을까.

 미디어의 힘은 우리를 그 안에서 살 수 있게 해주는 힘이다. 그래서 보드리야르의 생각처럼, 미디어는 현존한다는 사실 자체로 사회 통제의 성격을 갖는다. 더 나아가 미디어는 우리가 더 이상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을 응시하거나 바라보게 하지 않고 객관적 외관의 지평 너머만을 보게 만든다. 이 같은 ‘치명적 부주의’는 의외의 것에 대한 기대감을 부추기고, 대의 민주주의조차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치명적 부주의와 무감각함은 미디어 앞에 운집한 사람들 전체를 ‘과대망상증’에 빠지게 한다. 이를 비릴리오는 “상호적 공감을 내향병리(intropathie)로 대체한 자아비대증의 가속화”라며 우울해한다.

미디어는 정보의 생산에서 자극의 생산으로 전환되고, 판별을 장려하는 대신에 단순화의 대중적 정신병을 유발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생각한다. 도대체 미디어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인가. 미디어에 어떤 기대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지금이 맥루언을 다시 읽고 비판적인 미디어생태학을 정립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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