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찬희 / 언론문화연구소 연구원

 

   제목에서 내비쳤듯이 이 책은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는 책이다. 저자는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 세 가지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첫째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공리주의, 둘째는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적 견해, 셋째는 미덕과 좋은 삶으로 표현되는 공동선을 이해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자는 세 번째 방식으로 정의를 추구하며, 정의로운 사회는 도덕적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받고, 시민의 미덕을 키우는 사회라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를 주장하기까지 저자는 다양한 사례를 언급하면서 각 접근 방식의 장점과 단점을 비교한다. 저자가 언급하는 다양한 사례들은 우리들을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가령 이렇다. 비밀리에 작전을 수행하는 군인들이 민간인과 마주쳤다. 그들을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또는 브레이크가 파열된 전차를 운전하고 있다. 진행 중인 철로에 인부 다섯 명이 작업을 하고 있고 비상 철로에는 한 명의 인부가 작업 중이다. 어느 쪽으로 방향을 틀 것인가. 낙태를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

  명확하게 답변할 수 없는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저자는 정의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두 개의 선택지에서 어떠한 것이든 일단 선택을 하면,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은 정의를 이해하는 각각의 견해로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조금 인색해지는데, 선택의 문제뿐 아니라 판단의 문제에서도 결론은 모호해진다. 저자 스스로가 선택 혹은 판단의 딜레마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정의(正義)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의 정의(定義)를 선호하는 저자는 공리주의와 자유주의로 해결하기 힘든 딜레마적 상황들을 풀어나가기 위해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를 결론처럼 제시한다. 이를 위해서는 희생과 봉사라는 시민의식과 연대라는 이름으로 불평등을 해소하고,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수정해야 하며, 또한 정치는 도덕에 개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책을 읽는 동안 궁금했던 점은 저자가 시장자유주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정의로 시장을 설명하는 것이 물질적 삶의 조건들을 위치 짓는 현재의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틀을 제공하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있었다. 저자의 지적처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극대화시키는 공리주의는 다수에 포함되지 못하는 소수를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윤리적 한계를 갖는다. 그리고 개인의 능력과 자유로운 선택을 강조하는 자유주의는 능력과 선택이라는 것이 특정 조건하에서 미리 결정되어 질 수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그러나 저자의 마지막 제안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으레 생기게 마련인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가꾸어야”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관용이라는 단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저자가 선호하는 미덕을 키우고 포상하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방식은 지금 현실에 대한 해답이 되지 못한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거둬 빈자들에게 혜택을 주는 정책은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정의로운 사회에서처럼 재화 분배가 관용의 측면에서 이루어질 경우, 관용은 하나의 통치전략이 될 수도 있는 한계를 갖는다. 정의로운 사회란 ‘만인이 평등하고 서로의 의견을 개진하고 나누며, 사회적 노동을 통해 생산된 재화는 다시금 사회적으로 분배하는 사회’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샌델의 정의는 다소 빈약한 답이었다.

  정의에 대해 고민을 한 사람이 비단 샌델만은 아닐 것이다. 유럽의 여러 학자들이 오래전부터 고민하던 부분이 지금에 와서야 이토록 화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이 들며, 샌델의 특집 기사를 낸 미디어들이 보수언론들이라는 점에서 조금은 개운치 않은 뒷맛이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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