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주 / 철학과 박사과정

    표현의 자유는 개인주의적 권리개념에 근거한다. 이 개념은 또한 성적인 자율권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이를 포르노그라피의 문제에 적용시켜 보자. 우리가 성적인 자율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할 때 덧붙여 말해야 할 것은 없는가? 만약 우리가 그러한 권리를 갖는다면 그것은 포르노그라피를 생산하고 소비할 권리까지 포함하는가.
   알트만은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권리와 성적인 태도에 대한 권리가 성적인 자율에 대한 권리 안에서 같은 기반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한다. 알트만은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권리는 성적인 자율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해악이 있다 할지라도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권리가 법적인 권리뿐 아니라 도덕적 권리까지 포함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떤 것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그것을 할 수 있는 도덕적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는 다른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어떤 해로운 것에도 도덕적인 권리가 있다고 언급한다.
   그렇다면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권리는 도덕적 평가의 어느 범위에 위치해야 하는가.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나에게 아들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는 포르노그라피에 중독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아들이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그가 포르노그라피를 자유롭게 볼 권리가 있기 때문에 나는 그런 권리를 존중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인가. 만약 그가 거실에서 도색잡지를 보고 있고 있다면, 그의 가족들은 그의 행위가 매우 불편하다 할지라도, 그 상황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취할 권리가 없는가. 또 그의 교사는 그에게 포르노그라피를 보지 못하게 할 권리가 없는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권리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동성애자로 사회에서 살 권리 혹은 피임기구 사용에 대한 권리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도덕적 판단의 영역 반대쪽 끝자락에 위치한다.
   하나의 권리가 다른 권리와 충돌할 때, 그 권리의 근거가 되는 권리가 존중받을 만한 매우 중요한 권리라고 해도 우리가 이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다. 심지어 이를 지키기 위해 사회적으로 많은 해악이 따른다면 마땅히 이를 거부해야만 한다. 포르노그라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일단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자율권의 근거가 표현의 권리이며 성적 자율권인지의 여부부터 따져보아야 한다. 더불어 그것이 가지는 해악 역시 적극적으로 고려해 보아야 하고, 이에 따라 권리 문제에 대한 재접근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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