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우진 / 대중문화비평가

  노스탤지어는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대한 정서다. 또한 시간이 우리에게 준 일종의 선물이기도 하다. 예컨대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 이제는 얼굴도 가물거리는 첫사랑, 지긋지긋한 자율학습으로 점철되었던 ‘고딩’ 시절, 혹은 이른 새벽마다 점호를 받던 군대 따위가 문득 그리워지는 것이다. 하물며 박정희라든가 전두환, 노태우 시절이 그리워진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노스탤지어는 확실하게 말해서 적어도 지금보다는 그때가 나았으리라는 오해가 만드는 정서다. 취업도, 연애도, 결혼도, 육아도 무엇하나 쉽지 않은 2010년보다 1989년이 왠지 더 좋아 보이고, 아이돌 음악만 판치는 2010년보다는 ‘진지한’ 음악이 흐르던 1994년이 왠지 더 좋아 보이는 그런 오해.  

 

 

 

 

 

 

 

 

 

 

 

 ■<글로리아>의 단칸방과 <나는 전설이다>의 락밴드

  ‘재개발도 안 되는 단칸방’에 모여 사는 사람들의 소소하지만 행복한 삶을 다루는 <글로리아>와 잘나가던 ‘여상시절’의 꿈을 찾아 현실을 박차고 나오는 <나는 전설이다>는 이 노스탤지어를 다룬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다만 <글로리아>가 인물들의 삶의 풍경에서 노스탤지어를 구현한다면, <나는 전설이다>는 인물들의 행위를 통해 향수를 자극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문제는 양 쪽 모두 그것이 피상적이거나 막연하다는 데 있다. 마치 ‘세상을 드라마로 배운’ 것처럼 이 두 작품 세계는 오래전 인기를 얻은 옛날 드라마의 풍경을 빌려온다. <글로리아>의 하숙집 풍경은 <서울의 달>과 겹치고, <나는 전설이다>는 록 밴드에 대한 막연한 동경들로 점철되어 있다.
 노스탤지어가 주도하는 이야기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사실 대부분의 ‘이야기’가 향수를 다루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으로 선택되고 사용되면서 필연적으로 과거를 왜곡할 때는 문제가 된다. 종종 그것은 계급적 차별에 대한 눈가리개로 활용되기도 하고 사회 모순으로 인한 삶의 문제를 숙명처럼 정당화하는 도구로도 쓰인다. 요컨대, 현실감이 없다. 서민들은 하나같이 가난하지만 희망적이고, 재벌가는 하나같이 돈과 명예만 밝히는 흡혈귀들이다. 그 허술한 토대 위에서 작동하는 희망이 ‘희망적’일 리 없다. 중요한 건 이런 노스탤지어가 ‘가난하지만, 어렵지만 긍정적인 사람들’이라는 상상 속의 계급을 통해 구현된 가상현실이란 점이다. 어쩌란 말인가. 그래봤자 ‘현실은 시궁창’인데.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