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20.5.5 화 23:34
기획사회
초월적 신의 죽음이라는 기독교의 ‘복음’박치현 / 사회학과 강사
이재원 편집위원  |  stjekyll@cauon.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271호]
승인 2010.06.03  00:37:06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1949~)  
자본주의는 그것을 견제할 대항체제를 결여한 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1989년 이후 내내 질주해왔다. 세계를 강타했던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곳곳에서 국가의 개입을 통해 자본주의를 조정하자는 목소리가 들리지만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출구가 없다는 느낌과 무력감이다. 지젝을 비롯해 바디우, 아감벤 등의 정치철학자들은 이러한 국면에서 대안을 모색한다. 특히 벤야민이 제시한, 신적 정의를 도입하는 신적 폭력에 의한 역사의 ‘중단/중지’ 논리는 최근 들어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들은 주체의 ‘윤리’에 대해 강조하고, 나아가 세속화 이후 기각됐던 기독교 전통을 재고·재전유한다. 무신론자이자 유물론자인 지젝에게 기독교 전통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돌파하는 주체와 공동체를 구성하는 전복적인 무기다.

도착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

주체의 질문에서부터 시작하자. 주체는 이 세계에서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Che Voui?, 즉 이 세상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면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지향은 달라진다. 지젝은 기독교를 통해 ‘다른 답변’을 제출하는 주체를 찾아낸 듯하다.

근대 이후 국가, 신, 도덕, 상징적 법 등 큰타자의 힘은 점점 쇠퇴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지젝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냉소주의 주체에 대해 지적한다.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체제에 안착한다. 냉소주의는 큰타자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큰타자와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주체가 현실에 안주(즉 현실로 도피)하도록 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향락(Jouissence)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냉소적 주체들은 현대의 소비사회와 전체주의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들은 초자아의 ‘즐겨라!’라는 향유 명령에 종속되어 있다. 큰타자가 약화된 현실에서의 상징적 법의 기능부전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견해를 입증할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라캉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금지된다”는 말이 진실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곤궁에 대처하기 위해 현대인들이 빠져들게 되는 유혹이 ‘도착(perversion)’이다. 쾌락의 과잉이 주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현대인들은 다시 금지를 도입한다. 사적 영역에서는 새도-매저키즘으로 각자 규제(법)를 발명하고, 웰빙 강박, 카페인 없는 커피, 다이어트와 채식, 육체 접촉 없는 섹스 등 수많은 금지를 만들어낸다. 상징적 법이 작동하지 않으므로 쾌락이 주체를 압도하는 한편, 법을 통해 기존에 얻던 향락(법의 뒷면에서 은밀한 위반을 하면서 얻게 되는 향락, 즉 ‘법의 외설적 보충’)도 사라질 위험에 처한다. 따라서 도착은 “인위적으로 법질서를 세우려는” 시도이자, “법의 위반을 성문화”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도리어 더 커진다. 부시를 위시한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 우파들이 행하는 ‘민주주의의 사도되기(이라크 전쟁)’를 떠올려 보자. 민주주의라는 큰타자를 자임하는 행위가 낳은 결과는 불합리한 전쟁이었다. 또한 지젝은 제도기독교가 ‘도착’의 유혹에 빠져 있다고 분석한다. <죽은 신을 위하여>의 부제는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이다. 지젝의 기독교 수용은 이러한 현대적 주체의 곤궁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다.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욥에서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의 이행과정이 보여주는 계시에 있다.

욥에서 그리스도로

유대교에 대한 지젝의 해석은 욥에 대한 해석에서 나름의 독특성을 보인다. 성서의 <욥기>는 고통의 정당화라는 이데올로기의 기본적인 전략을 폭로하는 “역사상 최초의 이데올로기 비판”이다. 그는 욥이 신의 무능함을 대면하는 유대인의 경험을 대표한다고 보았다. 욥은 자신의 엄청난 고난에 대하여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라는 히스테리 환자의 질문을 제기한다. 욥은 아마도 지젝이 헤겔에 이어 발견한 또 하나의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라고 할 수 있다. 세 친구들의 그럴듯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욥은 자신의 결백함과 자신의 고통이 지닌 무의미를 고수한다. 인간 욥의 고통과 그로부터 도출되는 신정론적 질문이 야기하는 것은 바로 신의 자기분열이다. 신은 욥의 주장이 옳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코믹물의 요소가 가미된 공포물’을 연출한다. 결국 욥의 시험에서 시험대에 오른 것은 신이었다. 유대교는 이러한 신의 무능함을 숨겨진 ‘유령적 역사’이자 ‘불문율’로, 발설하지 않고 공유하였기 때문에 영토가 없는 가운데서도 종족성을 유지하는 독특성을 성취했다고 지젝은 주장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욥과 유대교는 신의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신이 전능한 것 같은 겉모습만은 유지했다. 하지만 기독교, 특히 바울은 신이 자신의 무능을 대면했음을 드러낸다. 더 이상 은밀한 유령적 역사를 보충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의 새로움이다. 지젝이 보기에 욥의 자기분열은 신의 자기분열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신의 자기분열은 그리스도의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란 외침에 잘 드러난다. 정통 기독교를 옹호한 가톨릭 추리소설가 G. K. 체스터턴은 <오소독시>에서 이 외침을 ‘신의 무신론적 외침’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리스도는 욥의 반복이자 급진화다.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바로 저 너머의 ‘초월적 신’이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죽은 신은 (헤겔의 ‘부정의 부정’을 거쳐) 신자들 가운데 ‘성령’으로 부활한다. 바울에게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비극이 아닌 승리의 소식이 된다. 성령공동체는 사회적 질서의 특수성을 넘어 신자들을 ‘보편적 차원’에 직접 참여케 한다. 주체들은 큰타자의 상징적 허구에 매달리기보다는 실재에 기반하여 성립되며, 타자의 유한성과 연약함에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는 아가페를 성취한다. 성령공동체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큰타자를 상정하지 않고 환상을 횡단한 ‘분석가 주체’의 공동체이며, ‘법과 위반의 악순환’이라는 교착상태를 뛰어넘어 사랑(아가페)으로 서로 교류한다.

전복적 기독교는 가능한가 : 욥의 질문을 고수하기

지젝이 시도한 새로운 방식의 기독교 전유는 도착적 주체가 지배하는 현대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모색된 것이다. 지젝은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오로지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으며, 역으로 진정한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경험을 거쳐야 한다”고 말하면서, 전복적 기독교(꼭두각시)가 유물론(난쟁이)의 도움 하에 성립될 수 있다고 암시한다.

오늘날 우리는 욥처럼 각자의 고통으로 인해 현 신자유주의적 사회질서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다. 우리에겐 ‘개인 단위의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가거나, ‘루저’가 되는 두 경로 말고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경험 한복판에서 우리는 욥의 질문을 도입해야 할 것이다. “신은(이 폐쇄된 세계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의 삶을 설명해주는 많은 논리들이 있다. 성공 논리든, 자기계발서든, 명상서든, 제도종교든 이 모두는 욥의 세 친구처럼 우리가 이 세계의 현실로 도피하게 해주는 이데올로기적 설명을 제공한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세 친구의 설명을 거부하고 욥처럼 자신의 결백성과 고통의 무의미를 고수한다면, 그리하여 인간의 분열에 머무르지 않고(분열된 채로 살아가지 않고) 신을 시험대 위에 올리고 신의 자기분열을 낳는다면, 욥의 시험이 신의 시험을 낳았듯이 현 사회체제를 시험대 위에 올릴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를 분열시키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분열을 끝까지 추구한다면 화폐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추상적 보편성’이 시험대에 올라 자기분열하지 않겠는가. 결국 지젝이 말하는 신의 죽음은 자본주의 체제의 중단(중지)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이재원 편집위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06974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로 84 중앙대학교 302관(대학원) 201호 대학원신문사  |  대표전화 : 02-881-7370   |  팩스 : 02-817-9347
인터넷총괄책임 : 편집장 | 게시판총괄책임 : 편집장 | 청소년보호책임자 : 편집장
Copyright 2011 대학원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cauo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