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연 /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소노 시온 <노리코의 식탁>, <러브 익스포져>


 

 일반적으로 한 가정의 식탁은 단순히 가족 간의 유대와 소통을 확인하는 공간이지만, 소노 시온에게 그것은 개인과 집단이 맺고 있는 관계를 함축하는 공간이다. 그가 만들어낸 식탁의 풍경이 그러하다. <노리코의 식탁>에서 식탁은 영화의 가장 중요한 모티프였다. 노리코의 식탁은 억압적인 아버지와의 식탁에서 돈을 받고 가족 연기를 해주는 렌탈 가족의 식탁으로 옮겨간다. <러브 익스포져>에서도 장장 네 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주인공 유우의 식탁 풍경은 함께 앉는 사람들에 따라 그 의미가 변화한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사회적인 행복의 이미지를 연기하는 가정의 식탁으로부터 떠나간다. 그들은 억압적이며 불안정한 가정으로부터 멀어지지만, 여전히 자기를 보호해줄 수 있는 울타리를 필요로 하고, 이상적인 가정을 꿈꾼다. 렌탈 가족의 일원이 된 노리코는 가짜 가족의 식탁에서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느끼지 못했던 안온함을 느끼며, 유우의 가족들은 종교 집단인 제로 교회에서 완전한 가족의 식사를 누린다. 우리는 이미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에서 희망적인 대안 가정을 그려본 바 있다.


그러나 소노 시온의 대안적 식탁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그가 차린 완벽한 밥상은 자본으로 환원되는 시간이거나, 종교적인 세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상적인 가족의 식사는 내부에서 불안의 요소들을 제거시킴으로써 그들의 식탁 자체를 뾰족한 첨탑의 끝에 놓아둔다. 노리코의 아버지는 가족 렌탈을 의뢰하는 방식으로 노리코를 가족의 식탁 앞에 되돌려 놓으며, 노리코는 노리코를 연기함으로써 행복을 누린다. 유우는 더 나아가 행복에 도취된 가족들의 식사를 피바다로 만들고, 그들의 가족은 완전히 해체된다.


이제 식탁은 가족 내부의 관계를 넘어 사회와 개인의 문제를 환기한다. 인간은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실존을 회복할 때 사회와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러기에는 가정은 단지 거대한 사회의 축소판일 뿐이고, 개인은 겹겹이 쌓여있는 사회 바깥으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사회와 개인이 맺는 이상적 관계의 모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러한 전망에 대해 소노 시온의 영화는 비관적인 입장이다. 다만 그는 우리의 식탁 위에 놓인 긴장과 불안을 필연적인 것으로 승인하는 데서 출발하기를 바라는 듯하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그 불안만이 유일한 희망이 아닐까. 그의 영화가 끝나고 난 후, 모든 관객은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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