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원 / 영화평론가

얼마 전 한 지인이 예술영화와 상업영화를 구분하는 자기만의 독특한 방법을 알려주었다. 한참을 졸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화면이 잠들기 전 그대로이면 그 영화가 바로 예술영화라는 것이다. 그럴 법한 구별법이라고 웃으며 넘어갔지만 왠지 개운치 않았다. 실제로 예술영화라 불리는 많은 작품들은 몇 가지 정형화된 문법 안에 갇혀있다. 롱테이크나 적은 컷 수, 느린 화면 등은 어느새 예술 영화를 지칭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영화 동아리나 아마추어 영화인들이 만든 영화들을 보면 이런 고정관념은 더욱 심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과연 그와 같은 문법들이 진정 영화의 예술성을 구분하는 잣대가 될 수 있을까.

예술과 산업, 경계에 선 새로운 문법들


근대 이전의 예술은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중세의 작가는 몇몇 스폰서에게 소속되어 작품을 제공하는 공급자였기에 대중의 욕망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 예술은 하나의 산업이 되었다. 소수의 특권 계급은 다수와의 ‘구별 짓기’를 위한 도구로 예술작품을 활용했고, 작품이 유통되는 ‘시장’을 통해 소위 ‘예술가’가 탄생했다. 작가는 소수를 위한 소비와 유통, 그리고 가치의 유지를 위해 시장에 의해 선별되고 통제됐다. 예술가의 개인적 창조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과 산업이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영화의 탄생은 이른바 예술시장의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영화는 절묘하게 예술과 산업의 경계에 서 있는 매체다. 영화가 처음 탄생했을 때 그것은 혁명적인 기술이었다. 사진과 더불어 복제를 통한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해준 영화는 회화가 가지고 있는 특권적 지위를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이제 영화로 대표되는 예술은 대중을 대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다.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통해 밝힌 것처럼, 대상의 아우라를 벗겨내는 영화 기술은 개인이 아닌 대중이 예술의 수용자가 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대량 생산의 기술은 예술을 소유하는 것에서 소비하는 것으로 변모시켰고, 시장은 더욱 확대됐다.


그러나 초기 헐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스튜디오 영화를 예술이라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산되고 소비되는 산업의 영역에 더 가까웠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최초의 영화는 ‘기술’이지 ‘예술’이 아니었다. 스튜디오 시스템의 그늘 아래에서 영화는 작가의 이름을 내걸지 않았고, 오히려 스튜디오의 이름이나 배우 혹은 제작자의 이름이 영화를 대표했다. 1954년 프랑스의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가 영화비평잡지 <까이에 뒤 시네마>를 통해 이른바 ‘작가선언’을 발표한 이후 영화는 비로소 감독의 책임 하에 만들어지는 예술이라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물론 영화는 문학, 미술과는 달리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매체이므로 온전히 한 사람의 것이라고 할 수도 없거니와 작가선언 이전에도 ‘제7의 예술’을 표방하는 많은 예술영화들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단지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롱테이크로 상징되는 예술영화 특유의 표현양식들은 이 시기 스튜디오 시스템의 영화와 결별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새로운 문법들이라는 점이다. 예술 영화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이 시기로부터 출발했다. 이러한 기법들은 분명 창조적인 작가의 목소리지만 오늘날 많은 영화에서 관습적으로 쓰는 순간 그 창조적 생기는 사라진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다. 형식이 내용을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 형식으로 발화되어야 한다. 기존의 관습과 익숙함을 깨고 창작자 고유의 사고를 새롭게 담아내는 것, 그것을 통해 관람자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이며 예술가가 추구해야 할 자세다. 지금은 단순히 예술 영화의 한 양식으로 인식되는 롱테이크나 느린 편집은 작가선언에 동참한 감독들이 당대의 전형적인 양식에 대한 반발 과정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영상문법을 고민하며 탄생시킨 영화 언어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말하는 사람이나 상황, 얘기를 듣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담고 다르게 표현될 수 있는 것처럼 영화 언어 또한 그러하다. 롱테이크는 단지 하나의 양식일 뿐이며, 어떤 내용을 담고자 그 문법을 쓰느냐에 따라 그것은 의미가 될 수도 있고 단순한 흉내에 그칠 수도 있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예술가’라고 인식하는 대다수의 작가들은 익숙한 관습을 부정하고 자신만의 언어, 혹은 표현법을 발견했다. 즉 예술은 관습에 대한 파괴와 저항을 통해 그 역동적 에너지를 분출한다. 

대중과의 소통인가 대중의 눈치 보기인가


오늘날 디지털 기술의 등장은 또 한 번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왔다. 과거 영화나 사진과 같이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를 열었던 기술들이 관람자의 폭발적인 확대로 시장을 변화시켰다면, 디지털 기술은 거기에 더해 모든 문화소비자가 창작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제 예술은 창작자와 수용자 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다수의 창작자와 다수의 수용자가 실시간으로 교감하는 새로운 영역으로 도약한다. 영화에 한정해서 이야기하자면, 디지털 기술은 창작의 접근 장벽을 극단적으로 낮추어 누구나 영화를 찍을 수 있게 해주었고,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유통망을 통해 다수의 관람자에게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시장의 지배를 벗어나 바야흐로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할 것인가.


이러한 ‘예술의 민주화’라는 청사진 앞에는 두 가지 환상이 끼어있다. 첫째, 기술에 대한 낙관이다. 분명 새로운 기술은 시장을 변화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상업의 힘에 속박되지 않는 민주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과거 관객을 스크린 앞 의자에 붙박아 두고 독점적 위치에서 영화를 제공하던 제작의 메커니즘에 변화가 찾아올 것은 분명하다. 인터넷을 통한 적극적인 의견 개진과 창작자와 관람자 간 소통의 가능성은 민주적인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달콤한 환상을 자아낼 만큼 매력적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지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 오히려 거꾸로 영화의 제작 전반이 관객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시장 지배적인 구조가 더욱 공고해질 수도 있다. 소비자의 역동적인 참여가 도리어 창작자의 개성이 반영된 독특한 영화가 만들어질 기회를 앗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모두가 영화를 만들지만 아무도 ‘예술’을 만들지는 못할 수 있다. 작품이 생산되는 한 그것을 소비하는 ‘시장’ 자체는 소멸하지 않는다. 과거 소수의 특권층을 위해 봉사하던 예술이 기술복제시대를 거쳐 대중을 향해 방향을 전환한 것처럼,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여전히 자본주의의 그늘 아래 단지 새로운 방식의 프레임만을 제공할 뿐이다.


두번째는 문화시장에 대한 낙관이다. 예술은 분명 대중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대중의 취향에 편승해 단지 소비되기만을 기다리는 작품은 이미 예술로서의 생명력을 상실한 것이다. 예술의 창조성은 공감이 아닌 반감에 있기 때문이다. 마르셀 뒤샹과 앤디 워홀이 기성품을 예술작품으로 탈바꿈 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꼭 디지털 시대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일찍이 루돌프 아른하임이 말한 바와 같이 영화를 예술로 만드는 것은 바로 영화가 가진 기술적 한계다. 작가는 한계와 제약이 있기에 그것을 극복하고자 독창적인 문법을 창조한다. 예술가란 그 창작의 영역에서 숨 쉬는 생물이다.


사실 평등이야말로 예술과 가장 거리가 먼 단어다. 보편적이고 평등한 것은 이미 예술이 아니다. 예술은 저항하고 파괴함으로써 세계와 나의 실존을 드러내야 한다. 관습 안에서 헤엄치는 그것은 그저 유희를 위한 소모품에 다름 아닌 것이다. 결국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는 있지만 모두가 예술가가 될 순 없다. 모두의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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