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훈 / 카이로스 연구원

 

주권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전개하는 사상가로 알려진 아감벤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매우 많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주목해야할 이름은 발터 벤야민일 것이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아감벤의 사유는 슈미트의 ‘주권론’과의 대결 속에서 전개되고 있으며, 대결 과정에서 벤야민은 아감벤에게 끊임없이 사유의 영감을 제공하는 원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8번 테제에서 언급하고 있는 ‘진정한 예외상태’라는 문구다. 아감벤에 따르면, “진정한 예외상태를 도래시키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는 벤야민의 구절은 사실상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라는 슈미트의 테제를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 그러나 벤야민은 어디에서도 그 ‘진정한 예외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세하게 기술한 바가 없다. 바로 이 수수께끼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아감벤은 사도 바울에 주목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감벤에게 있어서 사도 바울은 최초의 ‘진정한 예외상태’의 이론가다. 그렇게 주권과 법에 대항하는 독특한 정치적 사유의 계보, 그러나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주목한 바 없는 은밀한 계보가 성립하게 된다. 바울-벤야민-아감벤으로 이어지는 계보 말이다.

주권자와 메시아 : 예외상태를 둘러싼 거인들의 전투
아감벤의 정치적 사유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개념은 무엇보다도 ‘예외상태’일 것이다.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호모사케르>는 주권에 의해 권리를 박탈당한 채 단지 생물학적 생명의 지대로 던져진 존재들, 즉 벌거벗은 삶(bare life)의 비극에 주목하는 책이 아니라 이러한 벌거벗은 삶을 언제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주권의 작동방식에 대한 책이며, 그러한 주권의 근본구조가 바로 예외상태임을 밝히는 책이다. 그리고 ‘호모사케르’ 연작의 두 번째 책인 <예외상태>는 예외상태의 구조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아감벤에게 있어 예외상태는 관건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남겨진 시간> 역시 예외상태라는 아감벤의 문제의식 속에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아감벤이 그토록 주목하는 예외상태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예외상태란 일상적인 주권적 질서 혹은 법질서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법질서를 중지하고 그 사태를 종식시킬 때까지 기존의 법질서에 구애받지 않는 특수한 권력이 활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예외’라는 말을 쓰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일반적으로 정상을 벗어난 사태이자 매우 특수하고 특별한 사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아감벤은 그것이 사실상 정상적인 법질서를 떠받치는 은폐된 근간이라고 주장한다. 아감벤에게 예외상태란 오히려 일상의 법질서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 힘이다. 이렇게 은폐된 예외상태가 전면적으로 현실화되는 것은 법이 수호하고자 하는 질서가 심각하게 위협을 받을 때다. 그리고 이 때 입법기관의 권력이 실질적으로 행정기관으로 이양되는 양상이 나타나게 된다.

예외상태는 전쟁이나 내전 등과 같은 비상사태의 발발로 인해 정상적인 법질서가 붕괴될 위기에 처했을 때 선포된다. 물론 표면적으로 예외상태는 그러한 위기 상황을 다루기 위해 통치 권력이 취하는 형태다. 하지만 아감벤에 의하면 예외상태가 다루는 보다 심층적인 대상은 전쟁이나 내전과 같은 소요사태가 아니라 그 소요사태가 불러일으키는 공포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통치 권력이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게 되는 무질서에 대한 공포다. 다시 말해 법이 통제할 수 없는 혼돈, 즉 아노미아(anomia)에 대한 공포인 것이다. 예외상태란 근본적으로 이러한 아노미아를 법의 형식, 혹은 주권적 질서의 외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과 질서 안으로 포함시키기 위해 권력이 작동하는 형태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1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 국가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에 “예외 상태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 중의 하나-입법, 행정, 사법 권력의 구분을 일시적으로 폐기하는 일-가 통치의 영속적인 실천으로 전환되는 경향”(<예외상태>)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치 이후 ‘항구적인 비상 상태의 자발적 창출이 현대 국가의 본질적 실천이 되었다’고 아감벤은 말한다. ‘물론 소위 민주주의 국가까지도 포함해서’ 그렇다. 예외상태란 통치질서의 패러다임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벤야민이 말하는 ‘진정한 예외상태’는 바로 주권자가 창출하는 예외상태에 맞서기 위해서 제시된 개념이다. 이러한 진정한 예외상태는 메시아와 더불어 도래한다. 메시아 역시 현실적인 법을 중지시키는 자다. 흥미롭게도 아감벤은 메시아가 도래시키는 ‘진정한 예외상태’ 역시 주권자의 예외상태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남겨진 시간>에서 아감벤은 예외상태의 일반적 특징을 ‘법률의 외부와 내부의 식별불가능성·이행불가능성·정식화불가능성’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주권적 예외상태나 메시아적 예외상태에서나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양자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바로 이 지점에서 바울의 사유가 중요해진다. 바울에게 메시아의 도래는 언제나 율법의 중지를 의미한다. 하지만 바울은 율법의 중지가 곧 율법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메시아는 그것을 완성한다고 말한다. 이는 무슨 의미인가. 아감벤은 바울이 ‘중지’를 의미하기 위해 사용한 고대 헬라스어 동사 ‘카타르게인(katargein)’의 의미에 주목한다. 아감벤에 의하면 이 동사의 의미는 ‘작동하지 못하게 하다, 비활성화 시키다, 효력을 멈추게 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아감벤은 ‘카타르게인’이 바울이 자신의 사유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전문용어임을 환기시키고, 이 용어가 ‘작동·행위·현실태’의 뜻을 담은 ‘에네르게이아(energeia)’의 대척점에 있다는 것을 밝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네르게이아가 현실태를 의미하는 헬라스 철학의 용어이기도 하며, 가능태를 의미하는 ‘듀나미스(dynamis)’와 관련해 이해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용어분석을 통해 아감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메시아의 도래를 통한 법의 중지(카타르게인)란 현실태(에네르게이아)로 작동하는 법을 다시 그 가능태(듀나미스)로 되돌리는 것이라는 점이다. “메시아적인 것이란 율법의 파괴가 아니라 비활성화이며 수행불가능성이다.”(<남겨진 시간>) 법을 비활성화하고 수행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현실태의 법을 가능태의 법으로 변용하는 것이며, 이 변용이 바로 법의 폐지가 아니라 완성이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슈미트의 주권이론, 즉 주권자가 창출하는 예외상태론은 메시아가 도래시킨 법의 중지에 맞서 여전히 법을 현실에서 작동시키기 위한 주권권력의 대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메시아의 도래는 주권권력에게는 법이 위기에 처하는 아노미아를 의미하며 주권권력이 창출하는 예외상태는 바로 이 아노미아를 여전히 법의 형식 속에 붙잡아두기 위한 역설적인 법의 대응-법질서의 중지를 통한 법질서의 유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법과 삶, 그리고 정치
아감벤의 다른 글들이 그렇듯이 <남겨진 시간> 역시 그에게 던져지는 최종적인 질문에 답변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법의 중지, 법을 비활성화하고 수행불가능하게 만드는 가능태로서의 법이란 우리의 정치적 현실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답변은 여전히 모호하다. 다만 주권이라는 괴물에 의해 인간사회가 조건 지워진 오늘날, 아감벤의 논의는 우리의 정치적 삶이 처한 근본적 한계를 다시금 성찰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한국의 정치적 상황은 현실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더 좋은 법을 만들고, 그러한 법을 만들 수 있는 더 훌륭한 주권자를 선출하는 것에 온통 정치적 관심이 쏠려있다. 이 속에서 아감벤은 주권질서 아래 살아가는 한, 우리는 언제든지 예외상태로 내던져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주권자가 창출한 예외상태를 일상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주권자의 법을 넘어 법을 삶의 구성을 위한 가능성들의 조합으로 만드는 것이다. 아감벤의 메시아적 정치학은 우리에게 이 문제를 사유하도록 끊임없이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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