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원 / 도서출판 난장 편집장

폴란드 태생의 영국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1925~)은 근래 국내 출판계의 ‘핫’한 아이콘이다. 사실 바우만의 저서로는 2002년 <자유>(1988)가 국역된 바 있지만 당시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2008년 <쓰레기가 되는 삶들>(2004)이 소개된 후 최근까지 매년 1권 이상의 저서가 국역됐으며, 다른 저서들도 번역을 준비 중이다. 바우만의 저작 중 가장 최근에 국역된 <새로운 빈곤>은 원래 1998년에 발표된 저서로서 당시 빈곤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을 제공해준 것으로 각광받았다. 처음에는 다섯 개의 장으로 이뤄진 이 책에 “세계화 속의 노동과 잉여”라는 새로운 장이 포함되어 2004년에 제2판이 나왔고, 이번에 국역된 것은 바로 이 제2판이다.

소비미학이 만든 새로운 빈곤층
<새로운 빈곤>의 독창성은 한 사회가 유지되는 데 필수적인 구성원들의 통합원리, 체제의 재생산 방식, 개인의 행동양식이라는 세 가지 고리를 연결해주는 요소가 노동윤리에서 소비미학으로 변해갔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분석했다는 데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우만은 노동과 소비의 상호관련성뿐만 아니라, 이 두 요소에서 배제된 빈곤층이 어떻게 각자가 속한 사회를 지탱해주느냐까지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1~2장은 근대 초기 사회의 통합원리인 노동윤리가 소비미학으로, 즉 노동사회가 소비사회로 변모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식의 노동윤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노동하지 않는 자, ‘실업자’가 빈곤층이었다. 따라서 목숨을 연명하려면 노동해야 했고, 그래야만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소비에의 욕망을 욕망하게 만드는 소비사회에서는 소비하지 않는(또는 ‘못하는’) 자, ‘비소비자’가 빈곤층이다. 따라서 이제는 제대로 소비해야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 책의 백미인 3~5장은 이렇게 노동윤리가 소비미학으로 대체됨에 따라 체제의 재생산 방식이 어떻게 변모해갔느냐를 살펴보고 있다. 노동윤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빈곤층은 ‘산업예비군,’ 즉 잠재적인 노동인구로 간주됐다. 따라서 이 비고용자들을 일하게 만듦으로써 체제를 재생산했다. 영국의 구빈법, 파놉티콘, 테일러리즘, 복지국가가 모두 이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비미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빈곤층은 체제에 ‘포섭’된다기보다 그저 ‘배제’된다. 요컨대 그들은 배제됨으로써 체제의 재생산에 기여한다. 저자가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이 배제의 기제가 바로 ‘최하층계급’(underclass)의 발명, 그리고 이와 연관된 ‘감옥산업’과 ‘보안국가’의 탄생이다. 1963년경 등장한 이 용어는 원래 탈산업화에 따른 일자리 부족으로 일하지 못하게 된 계층을 지칭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생계노동을 하지 않기로 ‘선택한’ 빈곤층”으로 그 의미가 바뀌었다. 이처럼 빈곤을 ‘선택’한 빈곤층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사회의 근심과 골칫거리가 된 빈곤층을 용이하게 비난하고 그들의 빈곤에 일조한 나머지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사면해주는 것이다. 감옥산업과 보안국가는 이들을 처벌, 격리, 감금함으로써 배제를 완성한다.

경험의 빈곤, 그리고 남은 문제들
결론격인 6장에서 저자는 기존의 노동윤리를 장인의식의 윤리로 대체해 노동을 노동시장에서 분리해내고(노동을 시장 중심의 가치평가에서 구해내기), 소득자격과 소득확보 능력을 분리함으로써(모든 시민에게 수당을 제공하는 시민수당제의 도입) 소비미학이 지배하는 디스토피아에서 벗어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우리는 바우만이 말한 것처럼 이 세상을 “강렬하고도 강렬한 짜릿함, 깊고도 깊은 체험의 매트릭스”로 보는 태도에서 먼저 벗어나야 할지 모른다. 바우만은 “내가 그 안에 거주해 거쳐 온 것”인 ‘체험’(Erlebnis)과 “나에게 [인과적으로, 혹은 깨달음으로] 나타난 것”인 ‘경험’(Erfahrung)을 구분하고 있다. 벤야민이 <경험과 빈곤>에서 말했듯, 인간이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워서 지혜로워지고 스스로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체험이 아니라 경험이다(옮긴이는 이 표현을 각각 “살면서 내가 겪은 일”과 “내게 생기는 일”로 옮긴 뒤, 우리가 겪게 되는 대상과 거리가 있느냐 없느냐가 ‘경험’과 ‘체험’의 차이라고 덧붙였는데, 오히려 저자의 논지를 더 헷갈리게 만드는 듯하다).

‘체험의 매트릭스’라는 표현으로 바우만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소비자들이 이 세상을 ‘찰나적’으로 스쳐 보낸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소비미학에 찌든 사람들은 ‘강렬한 짜릿함’만을 원할 뿐, 이 세상을 성찰 없이 그저 거쳐 갈 뿐이다. 그들은 능동적으로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수동적으로 살아지며, 그들에게는 바로 그것이 ‘정상적인 삶’인 것이다. 벤야민이 말한 빈곤은 경험할 능력이 말살된 현대인의 내적 빈곤이었다. 바우만이 말하는 새로운 빈곤층이 겪는 빈곤 역시 물질적 빈곤만은 아니다. 요컨대 새로운 빈곤층은 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기회조차 박탈당한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정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쓰레기가 되는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미처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을 돈(등록금)을 주고 제공받는 서비스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한, 우리 역시 새로운 빈곤층이 될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어느 정도 새로운 빈곤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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