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아 /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알랭 바디우는 <사도 바울>의 첫머리에서, 자신에게 바울은 사도도 성인도 아니며 그가 선언한 복음이란 것에 괘념치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이렇게 그를 종교와 관련시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 다음, 바디우는 바울을 통해 사유를 실천과 결합시키는 전투적 인물에 대한 탐색을 수행할 것이며, 특히 새로운 주체 이론을 마련하겠다는 의도를 표명한다. 통상 기독교를 제도로 확립한 인물로 지목받는 바울을 두고 이런 시도를 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독자적인 시각과 해석이 요구될 것임이 분명하다. 바디우에 따르면 바울이 해결하고자 했던, 그리고 사실상 바울을 다루는 바디우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문제는 집단으로 귀속되는 어떤 정체성에도 의존하지 않는 주체를 구성하는 것이었고, 여기서 핵심적으로 제기되는 범주가 바로 ‘보편으로서의 진리’다. 

이렇듯 바디우가 ‘보편’을 재정립할 필요성을 느끼는 데에는 물론 현재의 상황에 대한 그 나름의 판단이 전제되어 있다. 그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한편으로는 일반적 등가라는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화폐적 추상화와 동질화가 관철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폐쇄적 정체성으로의 파편화와 여기에 동반하는 문화주의 내지 상대주의 이데올로기가 득세하는 형국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공허한 자본의 ‘보편’과 정체성에 기반을 둔 공동체주의적 ‘특수’는 일견 대립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유지하고 상승시키는 관계라고 바디우는 강조한다. 이와 같은 진단은 정체성간의 차이라든지 소수집단의 권리를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자본주의적 보편에 저항하는 시도로서 불충분하다는 판단에 다름 아니다. 각각의 다른 정체성은 화폐적 동질성을 저지하기보다 그것이 작동하기에 적합한 계기이며 새로운 시장을 찾는 자본에 용이한 투자재료를 제공해준다. 정체성이라는 비등가를 가장하는 일은 실상 일반적 등가라는 자본주의적 논리가 요구하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공적 영역이 집단주의로 잠식되고 법의 중립성이 폐기되며 국가가 자신이 책임질 사람들의 정체성을 계보적·종교적·인종적으로 검증하겠다고 나서는 현재의 사태는, 설사 희생자집단 혹은 소수집단으로 정의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파편적인 정체성의 이름으로 구체적 보편성을 외면하는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바디우의 입장이다. 그러니 보편의 자리를 새롭게 마련하고 그에 근거를 둔 주체를 새롭게 정의해내는 일이 시급한 과제가 된다. 그렇다면 이 양자, 즉 화폐적 동질성도 정체성에 근거한 저항도 아닌, 혹은 자본의 추상적 보편도 부분들의 이익이라는 특수도 아닌 ‘보편적 특이성(universal singularity)’을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어떤 식의 구조나 법이나 공리로 회귀하지 않는, 또 역사적 선례에 기대거나 조직화된 주체에 귀속되지 않는 보편은 어떻게 가능한가. 바디우는 복음을 유대공동체라는 제약에서 끌고 나와 기존의 조직과 율법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보편적 진리로 정립하려 했던 사도 바울의 과제가 바로 이런 성격이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바울이 확립한 조건 중 예수의 부활이라는 진리의 내용만 제외하면 현재의 상황에 적용되지 못할 것이 없다.

차이를 횡단하는 ‘그리스도-사건’의 보편성

바디우는 개종 이후의 바울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그의 삶의 중요한 국면과 그의 텍스트(편지들)에 개진된 견해들을 비교적 세세히 짚어나간다. 먼저 바울에게 기독교적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은 어떤 변증법적 역전 같은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그야말로 시원을 이루는 사건이었으며 참이나 거짓으로 입증 가능한 사실의 질서가 아니었다. 이런 성격의 사건에는 즉각적인 주관적 인정과 그런 인정으로 뒷받침되는 보편성 이외에 어떤 다른 관습적 중간단계나 매개도 있을 수 없다. 바디우는 바울이 율법에 대한 지식이나 존중을 기준으로 등급을 나누던 율법파 유대 기독교인과 분쟁을 벌이게 되고, 그것이 결국 ‘기독교 교리가 어디까지 유대공동체라는 기원에 의존하는가’하는 문제로 귀결되는 과정을 차례로 짚어나간다. 이 분쟁에서 유대 기독교분파는 ‘그리스도-사건’이 옛 질서와 관습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지양하며, 율법을 종결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것이니 전통적 표식들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주장한 데 비해, 바울은 이 ‘사건’의 새로운 보편성은 유대공동체에 어떤 특권도 부여하지 않으며 공동체로서의 특징은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은, 그저 진리와 무관하다는 입장이었다. 정체성에 뿌리내릴 수 없고 즉각 ‘보편화될 수(universalizable)’ 있다는 점, 그것이야말로 진리가 갖는 특이성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바울에게 차이의 문제는 보편이 건설되기 위해 횡단하고 초월해야 할 것이며, 이때 횡단과 초월은 차이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차이에서 물러나고 차이를 둘러싸고 논쟁하지 않으며 그저 무심하게 가로지르는 일을 뜻한다. 바울은 금지, 제의, 관습 등을 옹호하라는 요구에 저항했고 또 그런 것들에 대한 도덕적 판단에도 저항했다. 바디우는 특수성의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야 하되, 다만 그것들이 진리의 사건과는 무관하다는 것이 바울의 입장이었다고 지적한다. 바디우는 보편적 사유가 낳는 ‘동일성’이 결국 나치의 집단수용소로 귀결된다는 비판에 대해, 그 수용소에서는 ‘사소한’ 차이가 생사를 가르는 절대적 차이가 되었음을 상기시키면서 나치는 오히려 타자가 자신과 같다는 태도를 폐쇄한 결과였다고 말한다.
  바디우에 의하면 바울이 의미한 보편성에는 평등이 필수적 상관물로 따라온다. 그리스담론과 유대담론이 성부의 담론, 즉 공동체를 어떤 복종의 형식에 묶어놓은 담론인데 반해, 바울에게 그리스도-사건은 계승이나 가르침 혹은 보상이나 대가가 아니라 ‘순수한 주어짐’으로서 예외 없이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논증이나 증거 없이 그저 즉각적이고 주관적으로 이 사건을 승인하고 선언하는 주체는 사건의 ‘아들’이며 그들 사이에는 아들들의 평등이 성립한다. 또한 여기서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의 특수성과 무관하며, 부활이라는 사건 속에 전적으로 흡수되는 존재이지 신에게 안내하는 매개가 아니므로 그가 ‘주인(master)’이고 사도가 ‘하인(servant)’인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진리의 보편성에 부합하는 실천적 규범 부재

바디우가 바울 해석을 통해 전달하는 보편으로서의 진리와 오로지 그것에 토대를 둔 주체 논의에 공감을 하더라도 몇 가지 질문은 남는다. 우선, 즉각 보편화할 수 있고 순수하게 주어지는 진리라 하더라도 기독교 신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런 것만큼 ‘모두’에게, 더구나 논증도 필요 없이 주관적 인정과 믿음의 대상이 되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는 바울이 했던 것만큼 혹은 그 이상의 실천이 요구될 것이며 이때 진리의 보편성에 부합하는 실천의 올바른 방도라는 문제를 바디우가 충분히 천착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와 관련되겠지만 바디우에게서 공동체, 정체성, 율법, 관습 등이 진리와 갖는 연관성(의 부재)이라는 문제도 간단치는 않다. 기본적으로는 진리가 기존의 공동체나 법이라는 층위와 철저히 무관하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그는 진리의 사건적 보편성이 ‘지속적으로 세계에 스스로를 기입’하고 ‘주체의 에너지에 원칙과 일관성으로 작용’하기 위해, 다시 말해 사사로운 확신에 그치지 않고 모두에게 효력을 갖는 ‘공적 선언’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하게 규범과 원칙이라는 측면을 띠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다소 복잡한 이런 부연설명은 바디우의 전체 논지를 잠식하는 요소는 아니며 오히려 그가 매우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문제의식을 가졌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해준다. 하지만 역시 이 문제에 있어서도 더 본격적인 논의를 다소간 회피했다는 인상은 여전히 남는다. 이 점은 바디우에 공감하는 독자들 모두의 과제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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