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호 / 예술과도시사회연구소 연구원

서울 성북구 삼선 4구역 장수마을. 한국 대안 개발의 새로운 역사가 쓰이고 있는 곳의 이름이다. 한국의 재개발은 폭력의 다른 이름이다. 일단 재개발이 결정되면 해당지역 건물들의 상태에는 아랑곳없이 기존 건축물과 주민들을 일방적으로 ‘철거’해버리는 것이 원칙처럼 통용된다. 그러나 주거환경 개선이 절실히 필요한 곳임에도 개발이익이 예상되지 않는 곳에 자본은 ‘강림’하지 않는다. 장수마을 역시 용적률의 제약과 문화유적 관련성 덕분에 건설회사가 손을 놓은 곳이다. 그런데 이곳을 주목한 이들이 있다. 성북주거복지센터, 주거권운동네트워크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장수마을 대안 개발 프로젝트 팀이다. 이들은 마을에 있는 10여 개 빈집의 주인들을 만나 설득한 끝에 두 곳의 사용을 허락받아 한 곳은 수리를 끝내고 작년 11월부터 ‘장수마을사랑방’으로 이용 중이다. 스쾃은 공간의 소유권에 문제를 제기한다. 누군가 소유하고 있으되 전혀 활용되고 있지 못한 공간에 주목한다. ‘그 공간이 비어있는 동안이라도 능동적인 에너지로 활성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도래할 이익만을 기다리는 허깨비같은 소유권보다 상상력 충만한 사용권을 주장하는 것이 스쾃이다.

한국의 스쾃, 달동네 판자촌에서 문래동까지

스쾃(squat)은 불법적인 점거를 뜻하는 말이다. 원래 이 말은 오스트리아의 목동들이 허가 없이 남의 초지에 들어가서 양에게 풀을 먹이던 행위에 어원을 두고 있으며 산업혁명 이후 오갈 데 없는 도심의 노동자들이 빈 건물에 들어가 살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용됐다. 불평등한 공간에 대한 고발인 동시에 부조리한 현실을 바꿔나가기 위한 주거권 운동으로서의 스쾃은, 68혁명을 거쳐 70년대 말 이후 점차 예술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빈 공간을 점유해 자기의 방식대로 사용하는 것을 이라고 한다면, 한국에서도 스쾃의 역사는 멈추지 않고 쓰여 왔다. 지금도 여전히 서울역과 을지로 지하도를 점유하고 있는 노숙인들의 자리가 그렇고, 수십 년 간 조성되어 온 달동네의 무허가 판자촌이 그렇다. 지금은 학생자치가 많이 위축되어 사례가 드물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대학 내 공간을 무단 점유해 사용하는 학생조직들이 남아있었다.

물론, ‘스쾃터’(squatter)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한국 최초의 을 시도한 이들은 ‘오아시스 프로젝트’의 멤버들이다. 2004년 8월 15일 오후, 몇 년째 방치되어 흉물이 된 목동 예술인회관 옥상에서 외쳐진 “시민에게 문화를! 예술가에게 작업실을!!”이라는 명랑하면서도 기운찬 구호는 한국 스쾃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을 알리는 신호음이었다. 당시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김윤환과 김강을 한국의 ‘커밍아웃 스쾃터 1호’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오아시스 프로젝트에는 수십여 명의 예술가, 활동가, 법률가, 운동가 등이 함께 참여했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이하 예총)의 예술인회관 사업은 이미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문제였으나 이렇다 할 해결방안을 찾지 못한 채 표류 중이었다. 오아시스 프로젝트의 예술행동은 큰 반향을 가져왔고 이후 국고보조금의 환수라는 성과를 일궈내기도 했다. 예술운동과 사회운동의 결합을 목표로 진행한 활동답게 이들의 행동은 누군가에게는 사회운동으로, 누군가에게는 예술기획으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문화정책과 행정의 문제제기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주거권에 대한 문제로 받아들여지는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빚어냈다. 물리적 점거라는 활동과 그 활동에 대한 기획, 행정과의 교섭, 담론투쟁, 법정싸움까지. 불평등한 소유권에 대한 문제제기이면서 예술가의 작업실에 대한 문제제기, 실패한 문화행정에 대한 준열한 비판,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 탐색까지. 사실 오아시스 프로젝트는 이 모든 것들이기도 했다. 오아시스 프로젝트는 예술인회관 점거에서 멈추지 않고 이듬해 10월, 대학로에 위치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소유의 빈 건물을 다시 한 번 점거했다. 불법적인 점거와 작품설치를 진행한 후, 예술위원장과의 면담을 통해 720시간의 합법적인 점거가 시작됐다. 이들은 720시간 동안 ‘생성하는 전시’를 표방하고 각종 작품설치와 공연, 토론회 및 간담회 등을 끊임없이 진행하며 예술인회관 문제에 대한 논의를 이어나갔다. ‘동숭동 프로젝트-720’로 명명된 이 활동은 한국에서 스쾃이 일시적인 기간이라도 합법적으로 운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 중요한 사례가 됐다.

오아시스 프로젝트와 비슷한 시기, 철거직전의 아파트를 점거하고 공동체를 꾸린 노숙인들이 있었다. 2004년부터 공권력의 철거압박과 이에 맞선 싸움을 통해 1년의 유예기간을 획득해 삼일아파트가 철거되는 2005년 8월까지 거주했던 이들의 이야기는 2006년 서울독립영화제 대상작, <192-399: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에 담기기도 했다. 이들이 발표한 성명서에는 ‘몫 없는 자’들의 썽썽한 외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자본주의에서 자기 몫을 착취당하고 이용당한 노숙인들은 주거권 확보를 위해 사회의 공간과 공공시설을 사용할 권리가 있다. (중략) 노숙인들의 반란은 사적소유의 철폐이자 평등사회의 실현이다.” - 더불어 사는 집 성명서 <노숙인들의 반란> 중.

삶과 분리되지 않은 예술, 스쾃

이후 오아시스 프로젝트는 공식적으로 해산했지만, 주요 멤버들은 영등포구 문래동에 자리를 잡고 ‘스쾃티스트 인터내셔널(www.squartist.org)’을 운영하며 세계의 터들과 꾸준한 교류를 펼치고 있다. 스쾃터와 스쾃티스트는 거의 구분 없이 사용되지만 맥락이 약간 다르다. ‘squatter’가 의 실행자라는 의미를 갖는데 비해 ‘squartist (squat+artist)’는 단어에서 드러나다시피 예술적 방법과 을 결합시키는 이들을 지시한다. 물론, 이 때의 예술은 우리가 인습적으로 받아들이는 모더니즘 예술과는 궤를 달리한다. 이들에게 예술은 구체적인 삶과 분리되지 않는 그 무엇이다. 대부분의 스쾃이 예술을 지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운동으로 인식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스쾃티스트들에게 삶과 예술과 정치는 분리되지 않는 한 몸인 것이다. 따라서 스쾃에서 예술운동이나 사회운동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예술운동이자 사회운동으로서의 ㅅ은 단순히 공간을 사용하는 활동만이 아니다. 은 기존의 예술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이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예술의 장이기도 하다. 이들에게는 개별 작품을 뛰어넘어 스쾃을 만들고 활동하는 과정 전체가 새로운 예술이다.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한 다수의 에서 활동했고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베테랑 스쾃터 SP38은 을 ‘과정’으로 볼 것을 주문한다.

“하나의 작품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바스키아처럼 불우한 거리에서 어떤 예술가와 작품을 발굴하여 의 새로운 예술가상으로 만드는 것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스쾃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설치예술, 살아 움직이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빈 공간은 예술가들을 통해 생명을 얻고, 예술가들은 온기와 작품으로 채워간다. 이 모든 과정 전체를 스쾃의 예술이라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기존의 예술 언어로 설명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언어로, 이론으로 규정되지 않는다고 해서 예술이 아닌 것은 아니다.” - SP38 인터뷰, <삶과 예술의 실험실 SQUAT> 중.

이들에게 ‘고독한 천재’나 ‘예술가의 신화’는 없다. 예술은 삶과 분리되지 않는 동시에 삶을 뛰어넘는다. ‘삶과 예술의 실험실’로서의 스쾃이 여전히 뜨겁게 현재진행형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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