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우 / 사회학과 박사과정

  숭례문은 무인경비시스템이 도입된 지 3년만에 불에 탔다. 3년이라는 기간 동안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었고 다른 공무원의 인건비 삭감에도 기여했을 터이니, 혹여 숭례문 복원 비용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효율적’ 사업이라 평가될 지 모를 일이다. 한편 서울 지하철에는 무인 발매기가 도입됐고, 역무원들은 자취를 감췄다. 나이 드신 분들이 기계를 사용할 줄 알건 모르건, 기계 오작동으로 인해 사람들이 출근을 하건 못하건, 역내 사고로 사람이 쓰러져 있건 말건 상관없다. 서울 지하철도 ‘효율적’ 경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학교는 새학기, 무인경비시스템을 도입하면서 방호원 22명을 해고했다.

  내년이면 테일러가 작업장을 거대한 기계와 같이 효율적으로 조직하려는 목적으로 ‘과학적 관리법’을 제기한 지 백년이 된다. 하지만 사회가 기계와 같은 효율의 세계가 되기에는 아직도 요원한 듯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숭례문에 불을 지르고, 간단한 발매기 조작 방법도 모르며, 지하철 표를 대여하려면 보증금이 필요하다는 ‘상식’조차 없기 때문이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사람은 기계처럼 영혼이 없는 좀비가 아니다. 좀비들로 가득찬 사회는 굴러갈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학생이 학점에 목숨 걸고, 교수가 논문 편수와 강의평가만 바라보며, 도난 손실 비용만 신경쓰는 대학은 이미 대학이 아니다. 대학이 무엇인지, 대학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도 않고, 던질 수도 없는 구성원들에게 대학은 ‘의미 없는 이름’에 불과하다. 테일러의 ‘과학’이 한계에 봉착했던 것도, 시장이 비인간적 제도로 불리는 이유도 이 지점에 있다. 무인경비시스템과 효율적 비용관리의 논리는 대학을 ‘대학으로서’ 굴러가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회가 무엇이고 인류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질 수 없다면, 대학 자체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비용 효율성의 논리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대학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아마도 대학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만큼 비효율을 양산하는 비효율의 온상이거나, 그 비용을 상쇄할 만큼 충분한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비즈니스의 성지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문득 ‘그래도 무인시스템과 철저한 비용관리가 필요한 곳이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왠지 그런 곳이 있을 것도 같다. 공동체의 목적과 존립에 관심이 없고 옆의 사람들과 삶을 나누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그래서 사람 자체가 효율성의 인격적 표상인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무인시스템이 적용돼도 상관없을 것 같다. 어차피 기계와 별 다를 바 없는 사람일 테니 말이다.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무인경비시스템의 도입을 제안했던 사람, 결재 도장을 찍었던 사람, 그리고 비용 효율성을 중심으로 학교를 재편하려는 사람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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