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20.9.4 금 14:15
기획문화
<이진경의 필로시네마> 탈주는 수상하다이종찬 / 영어영문학과 박사수료
천선영 편집위원  |  gmlssjrnfl@naver.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268호]
승인 2010.03.24  17:34:15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탈주’는 들뢰즈의 노마디즘 철학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용어는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의 <노마디즘 1·2> 출간 이후, 인문학 분야에서 여러 학문적 논쟁을 촉발시키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키며 대중화 되었다.

  <필로시네마>에서도 이진경은 탈주의 관점에서 영화를 독해한다. <동사서독>의 등장인물 모두는 사랑 때문에 상처를 입은 자들이며, 계속해서 그 상처에 매여 있다. 그들은 기억과 인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 반복강박에 시달리며 “망각의 소중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저자는 이를 허무주의라 말한다. <블레이드 러너>에서는 폐기명령을 거부하고 이탈한 복제인간 로이가 자신의 창조주 타이렐을 찾아가 그의 눈을 찔러 살해하는데, 저자는 이를 오이디푸스 사례에 비유한다. “이제 로이는 아버지의 상징적 공간에서, 오이디푸스적 공간에서 벗어난다.”

  또한 <모던 타임스>에서 소녀와 채플린은 경찰의 추격을 받지만, 소녀의 울음 앞에서 채플린은 “어떠한 경우에도 죽음이란 말은 말아요”라며 웃는다. 저자는 채플린의 웃음이야말로 “새로운 탈주의 길”이라 말한다. 이러한 ‘어떤’ 탈주의 판본들은 지나치게 긍정적이거나 확신에 차 있어, 불가피하게도 우리에게 괴이쩍게 다가옴을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과거를 기억할 수밖에 없는 자들을 허무주의자로 간단히 낙인찍을 수 있는가. 아버지 대신 자신의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적 공간”이 고작 패배주의로 귀결되는가. 촌각을 다투는 소녀의 깊은 절망 앞에서 우리는 진정 채플린처럼 쉽게 웃을 수 있는가.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필연적으로 기쁨의 윤리학이 될 수밖에 없다”던 들뢰즈의 주장을 떠올려 본다. 여기서 방점은 ‘기쁨’에 찍힌다. 스피노자야말로 ‘철학자 중의 철학자’라며 자신이 스피노자주의자임을 공공연히 밝힌 들뢰즈는, 실제 우리 세계의 시스템 내 ‘몰락’과 ‘파국’의 맥락을 진지하게 고려치 않거나 외면해버리고 있다.

  확실히 우리 시대는 긍정의 윤리로 도배돼 있고, 부정의 윤리는 태부족이다. 그러나 현실의 어떤 근원적 ‘불가능성’에 한줌의 ‘진실’이 있다는 것을 정신분석은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준 바 있지 않은가.

<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천선영 편집위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06974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로 84 중앙대학교 302관(대학원) 201호 대학원신문사  |  대표전화 : 02-881-7370   |  팩스 : 02-817-9347
인터넷총괄책임 : 편집장 | 게시판총괄책임 : 편집장 | 청소년보호책임자 : 편집장
Copyright 2011 대학원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cauo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