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 영어영문학과 박사수료

  ‘탈주’는 들뢰즈의 노마디즘 철학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용어는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의 <노마디즘 1·2> 출간 이후, 인문학 분야에서 여러 학문적 논쟁을 촉발시키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키며 대중화 되었다.

  <필로시네마>에서도 이진경은 탈주의 관점에서 영화를 독해한다. <동사서독>의 등장인물 모두는 사랑 때문에 상처를 입은 자들이며, 계속해서 그 상처에 매여 있다. 그들은 기억과 인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 반복강박에 시달리며 “망각의 소중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저자는 이를 허무주의라 말한다. <블레이드 러너>에서는 폐기명령을 거부하고 이탈한 복제인간 로이가 자신의 창조주 타이렐을 찾아가 그의 눈을 찔러 살해하는데, 저자는 이를 오이디푸스 사례에 비유한다. “이제 로이는 아버지의 상징적 공간에서, 오이디푸스적 공간에서 벗어난다.”

  또한 <모던 타임스>에서 소녀와 채플린은 경찰의 추격을 받지만, 소녀의 울음 앞에서 채플린은 “어떠한 경우에도 죽음이란 말은 말아요”라며 웃는다. 저자는 채플린의 웃음이야말로 “새로운 탈주의 길”이라 말한다. 이러한 ‘어떤’ 탈주의 판본들은 지나치게 긍정적이거나 확신에 차 있어, 불가피하게도 우리에게 괴이쩍게 다가옴을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과거를 기억할 수밖에 없는 자들을 허무주의자로 간단히 낙인찍을 수 있는가. 아버지 대신 자신의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적 공간”이 고작 패배주의로 귀결되는가. 촌각을 다투는 소녀의 깊은 절망 앞에서 우리는 진정 채플린처럼 쉽게 웃을 수 있는가.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필연적으로 기쁨의 윤리학이 될 수밖에 없다”던 들뢰즈의 주장을 떠올려 본다. 여기서 방점은 ‘기쁨’에 찍힌다. 스피노자야말로 ‘철학자 중의 철학자’라며 자신이 스피노자주의자임을 공공연히 밝힌 들뢰즈는, 실제 우리 세계의 시스템 내 ‘몰락’과 ‘파국’의 맥락을 진지하게 고려치 않거나 외면해버리고 있다.

  확실히 우리 시대는 긍정의 윤리로 도배돼 있고, 부정의 윤리는 태부족이다. 그러나 현실의 어떤 근원적 ‘불가능성’에 한줌의 ‘진실’이 있다는 것을 정신분석은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준 바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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