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희 / 연세대 인문예술대학 겸임교수

‘공공예술’은 자율적인 주체로서의 ‘작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그리고 독창적인 형식을 통해 ‘저자가 부여하는 일관된 의미의 총체’(롤랑 바르트)로 드러나고 ‘자기지시적 기호’(로잘린드 클라우스)로 작용하는 ‘작품’이었던 모더니즘 예술에 대한 이론과 관념을 넘어서려는 미적 실천들 속에 자리잡고 있다.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구성주의, 그리고 이후의 여러 모더니즘적 예술 시도들은 다양한 층위에서 미술 자체의 의미변화와 예술의 사회적 공간-예술이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사회적 과정과 예술의 실천 장소로서의 사회적 공간-에 대한 실천적 비판을 촉진해왔다. 예술의 자율성을 완성한 즉시 붕괴되어버린 미니멀리즘 예술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모더니즘 예술은 존재론적 부재를 통해 의미론적 확장을 이루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즉 모더니즘 예술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엄격하게 견지하면서, 전통과 단절을 강조하는 한편, 과거에 대한 이미지들을 단일화하고, 삶의 복합성과 과거와의 연속성을 제거시켜왔다.

모더니즘 이후 예술의 변화

‘모더니즘 이후의 예술’은 예술의 죽음을 표방했던 모더니즘 예술이 행한 파괴가 도달한 침묵, 백지, 순수한 육면체, 단색 화면 등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순간에 도달했음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과거는 형식들의 창고일 뿐만 아니라 복합적인 문제와 모순적인 질문들을 창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대화적 공간’(로버트 벤추리)으로 다시 언급되기 시작했다. 해석학적 술어들로 다듬어진 과거가 새롭게 재구성되면서, 미래에 의거하여 ‘지금, 여기’의 절대적 원칙인 순수한 부정, 반(反)예술을 고수해온 모더니즘 예술의 메타서사들은 점차 신뢰성을 상실했다. 대신 메타서사의 자리를 이질적이고 국지적인 수많은 작은 이야기들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모더니즘 이후의 예술에서는 ‘예술가 주체’라는 근원으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라 그 근원을 제거하여 새로이 ‘독자’를 탄생시켰고(롤랑 바르트), ‘예술작품’은 이질적인 언어들이 놀이를 벌이면서 발견하는 ‘창조와 자유의 가능성’으로 타진되었으며(장-프랑수아 료타르), 예술 형식의 ‘순수성’ 대신에 ‘비순수성’이 미학적 본질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기 스카페타).

모더니즘 이후의 예술이 개별적으로는 의도나 함축적 의미, 미적 성과 등에서 매우 광범위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작업에는 일정한 관습 또는 미적 태도의 공유가 발견된다. 모더니즘 예술에서는 미적인 것이 예술작품의 투사를 통해 세계 인식을 성취하므로, 예술은 세계 이해의 일상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반면 모더니즘 이후의 예술에서는 미적인 것이 존재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세계 투사의 가능성을 지니게 되고, 예술의 목적은 개인들의 역사적 교양, 또는 인간의 자기정립으로서 규정된다. 예술작품은 세계 투사의 결과물이지만 동시에 삶을 향한 존재의 자극제 또는 보호막이 되어 현존하는 구체적 현실과 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예술작품에 대한 역사, 예술작품 생산에 대한 역사 그리고 예술작품 수용에 대한 역사 등이 생활세계의 지식을 포함한 다차원적 지식을 형성하면서 통합적으로 다루어진다.

모더니즘 예술을 넘어서려는 작업들의 새로움은 세계 분할과 단선적 분석에 대한 낡은 애정으로부터 벗어나,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과 삶을 향한 예술이라는 과제를 통해 세계 해석의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고자 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예술적 현실은 어떤 한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고정적으로, 그리고 오늘, 이곳에 한해 독점적으로 전유될 수 없고, 사회 안에서의 문화적 교류와 소통을 통해서만 인간을 위한 공동기반(교양)이 될 수 있다. 이는 모든 예술이 홀로 또는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다른 사물, 그리고 다른 시간, 다른 공간들과 함께 공동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우리는 이것을 예술의 공공성이라 부른다. 공공예술은 이러한 전제에서 논의될 수 있다.

‘새 장르 공공미술’을 통해 본 공공예술

관례적인 공공미술은 주로 ‘1% 예술정책’에 의존하면서 물리적 공간과 미적 오브제 사이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정당화해왔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생겨난 공공예술의 새 조류는 예술이 어떻게 공공영역에 개입하는가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여기에서 공공영역은 참여와 개입이 가능한 작품 제작과정의 회복뿐만 아니라, 토론과 교육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공간(‘예술은 사회적 공간이다’)으로서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수잔 레이시는 새로이 등장한 공공미술의 흐름을 ‘새 장르 공공미술’이라고 정의하면서 이것이 1960년대의 해프닝(행위예술)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맑시즘, 페미니즘, 생태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한다. 새로운 공공미술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상품으로서의  미술작품이라는 위상에 저항하고, 작가와 작품을 시장과 여론에 내맡기는 전략을 거부하는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변화를 꿈꾸었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진취적 역할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새 장르 공공미술은 ‘해체’와 ‘재구축’이라는 상이한 방식으로 모색된다. 의미와 가치를 세계에 대한 낡은 접근으로 간주하면서 풍자와 패러디로 응대하는 해체주의적 방식은 행동으로 쉽게 연결되지 않는 어려움을 보여준다. 반면 ‘참여’라는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는 재구축주의 방식은 능동적인 삶의 자세를 강조함으로써 개인의 이기를 벗어난 공공성의 확대를 모색한다.

새 장르 공공미술은 지속적으로 사회적 공론장을 형성하면서 노숙자-빈곤, 열대림-환경, 에이즈-동성애, 가정폭력-폭력의 일상화 등과 같은 이슈를 통해 뚜렷한 가치지향을 표명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고, 반미술조차도 미술관에 안치시키는 권력과 자본의 구조에 저항하는 일에 가치를 두고 있다. 특히 시간적 차원을 드러내는 과정을 중시함으로써 미술에 대한 기존의 공공적 접근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는데, 이에 따른 작품의 형태는 종종 일시적인 모습을 띠기도 하고, 전세계적인 것보다는 지역적인 이야기에 충실하면서 정치적인 논쟁을 야기시키기도 한다. 새로운 공공미술이 관심을 갖는 이슈들은 대체로 사회적 치유(예술을 통한 치유프로그램), 문화적 다양성(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도록 하는 프로젝트), 지구환경적 각성(생태위기에 대한 경고를 담는 미술작업)에 집중되어 미술과 대중 사이의 소통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공공예술에 대한 지속적이고 활발한 논의는 여전히 필요하다. 기존 예술계의 훈계를 거부하면서 관람자들의 사회적 힘을 자각케 해주는 촉매제로서의 ‘작품’을 표방하더라도 어떻게 현대예술이 향락산업과 차별될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공공예술의 범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남아있다. 이와 관련하여 활발한 예술비평작업을 펼치면서 대안적인 공공예술의 위상을 정립하려는 개블릭은 서구 근대사회를 지배해 온 발전과 진보의 신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아울러 생태적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더욱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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