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연/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과거가 현재의 이미지를 창조한다
장 뤽-고다르, <사랑의 찬가>

 

에드가는 사랑에 관한 영화를 기획 중이다. 그는 파리의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는 ‘그녀’를 여배우로 캐스팅하려 하지만, 그녀의 자살 소식으로 인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녀가 유품으로 남긴 몇 권의 책은 에드가에게 잊고 있었던 그녀에 관한 기억을 상기시킨다. 시간은 에드가가 레지스탕스와 기독교의 관계를 조사하기 위해 브르타뉴 지방을 방문했던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의 이야기가 시작된 직후, 카메라는 에드가가 가지고 있는 시몬느 베이유의 책 한 권을 클로즈업한다. 책의 겉표지에는 호안 미로가 1961년에 그린 세 편의 청색 연작 중 한 편이 등장한다. 미로의 <청색 II>는 가로 2.7, 세로 3.5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작품이다. 가까이에서 보면 바탕의 청색은 균일하게 화폭을 채우고 있지 않으며 붓터치의 굵기나 방향도 일정치 않다. 한 호흡에 그린 것이 분명한 붉은 선이나 검은 점들과는 달리, 바탕색은 오랜 시간을 두고 칠해진 흔적이 역력하다. 이 그림을 완성하는 것은 붉은 선과 검은 점들이지만, 그것들은 그동안의 시간을 모두 건 도박이면서 동시에 그 파랑 캔버스 위에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캔버스 위에 시간성을 소환하는 미로의 그림은 고다르의 역사와 영화에 대한 관념을 함축적으로 환기한다. 현실이 축적되어 온 과거 위에 또다시 축적되며, 과거가 현실의 선택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한, “역사는 지나가는 게 아니라 다가오는 것”이라는 고다르의 말은 옳다. 이 영화는 흑백 필름으로 촬영한 현재를 전반부에, 디지털카메라의 컬러 화면으로 구성한 과거를 후반부에 배치하고 있다. 그녀의 존재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베르타’라는 이름을 회복함으로써 구체적인 실재가 된다. 에드가의 현실이 기적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제 실패의 의미는 새롭게 읽힌다.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기 위해 망각의 심연과 끊임없이 대결하는 것, 그것이 고다르가 말하는 <사랑의 찬가>로서의 영화일 것이다.
 

고다르에게 영화는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가는 행위다. 미로는 푸른 달과 붉은 태양을 즐겨 그렸다. 푸른 밤의 캔버스를 찢고 나오는 한줄기 붉은 빛, 그리고 그 틈에서 쏟아진 것 같은 검은 점들은 우리가 볼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어둠 속의 형상들을 보여준다. 영화 내내 어김없이 예술가와 문필가들의 이름과 작품이 몽타주되는 가운데, 고다르는 단 한 번도 미로의 이름을 호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책의 표지로 단 3초간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린 이미지는 고다르가 인용한 그 어떤 문장보다 강렬하고 매혹적인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과거가 현재의 이미지를 창조해요.” 베르타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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