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석 / 문학평론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나라를 모두 합하면 몇 개나 될까. 해답이 자명한 듯 보이는 이 물음에는 놀랍게도 정답이 없다. 정답은커녕 난감한 반문이 돌아올 뿐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국가’의 개념과 요건은 무엇인가.” 예컨대 일반적인 세계지도상의 나라 수는 237개국이고 세계은행 기준으로는 229개국이며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통계로는 231개국이다. 어쩌면 ‘국가’는 처음부터 ‘누가’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개념이 아닐까.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가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 있는 나라들의 집합인 ‘세계’ 또한 상대적인 개념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우리의 기억이나 인지 바깥에 있는 ‘세계의 그늘’은 또 얼마나 넓을 것인가. 이 그늘 아래서는 하루 평균 2달러에도 못 미치는 생활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30억에 달하고, 그 절반인 하루 1달러 이하 생활자만도 13억에 이른다. 이를 반영하듯 <가난한 휴머니즘>은 ‘세계의 그늘’ 아이티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과 함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전횡 아래에서도 “구부러질지언정 부러지지는 않는”, ‘존엄하게’ 가난한 사람들의 위대한 역사를 기록한 증언록이다.
아홉 편의 호소력 있는 서간문으로 구성된 이 책의 저자는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전 아이티공화국 대통령이다. 그는 아이티 민주화운동의 살아있는 상징으로, ‘세계화 시대, 가난한 사람들의 길 찾기’라는 부제의 이 책을 발간하고, 4년 후 미국과 손잡은 쿠데타 세력에 쫓겨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망명했다. 그가 아이티를 떠난 2004년은 역설적이게도 아이티 독립 2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지난 1월에 일어난 대규모 지진참사가 아니었다면 이 세계 최초의 흑인공화국은 아마 필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이름조차 낯설었을 것이다. 아이티라는 타자는 천재지변으로 인한 가공할 만한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세계’의 일원이 되었다. 서방언론에 의해 잠재적 약탈자로 왜곡된 아이티 주민들이 멀고 낯설게 느껴졌던 만큼,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우리가 개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수전 손택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루되어 있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상을 해보자.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시위로 온 나라가 들끓었던 2년 전, 만약 누군가가 미국산 쇠고기가 훨씬 값싸고 질도 좋으니 한우를 모두 폐사시키고 미국소를 들여오자고 주장했다면 어떨까. 모두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라 여기겠지만 아이티에서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그 당시를 아리스티드는 이렇게 증언한다. “1982년 국제기구는 아이티의 농민들에게 돼지가 병들었으니 그 질병이 북쪽의 다른 나라로 퍼지지 않게 도살해야 한다고 단언했습니다. 병든 돼지 대신 더 나은 돼지들이 들어올 것이라는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개발 프로젝트에서도 보기 힘든 고도의 효율성으로, 13개월 동안 크리올 돼지(아이티 토종돼지)들은 모두 도살되었습니다.”

이른바 제3세계 약소국들의 처지에서는 주권의 위기와 생태환경 문제가 불가분이라는 사실을 이만큼 선명히 보여주는 사례도 드물 것이다. 그것은 아이티를 비롯한 대다수 약소국들이 자연에 순응한 농업 자치공동체에 생활기반을 두고 있는 데서 비롯한다. 따라서 ‘존엄하게 가난’하고자 하는 농업적 자립경제의 이상이 아이티 주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이는 반(反)신자유주의 노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아리스티드가 대통령 재임시절 단행한 공기업 국유화와 최저임금 2배 인상조치 등도 반신자유주의적 자립경제 건설을 위한 최후의 보루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대명사인 미국의 눈에는 아리스티드의 이러한 조처들이 ‘반칙’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를 축출하는 데 성공한 미국은 카리브해의 최빈국 아이티에 시장 개방을 강요했다.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숭배는 때로 ‘보이지 않는 주먹’에 대한 정당화로 이어진다. 이 ‘주먹’의 입장에서 볼 때 민주주의와 시장 자유주의는 사실상 동의어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미 경험해 본 고강도 구조조정과 농업부문의 해체를 똑같이 겪고 나면 아이티에 남는 것은 국부(國富)가 아니라 더 높아진 원조경제 의존도뿐이다. 1995년 미국 원조처장이 “모든 개발도상국에 원조하는 달러의 84퍼센트는 다시 미국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데 쓰임으로써 미국 경제에 되돌아온다”고 발언했듯이 미국이 주도하는 대외원조는 원조 비즈니스에 가깝지 않던가.

결국 미국이 남아메리카와 중동지역의 정치·경제에 개입하면서 그 명분으로 내걸고 있는 민주주의는 일방적인 ‘세계의 양지’화 룰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저마다의 민주주의가 따로 있다는 말일까. 이 책 <가난한 휴머니즘>의 진정한 가치는 민주주의 개념을 복수화하는 바로 이 한 문장에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민주화해야만 합니다.” N개의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인류 보편의 문제들에 책임 있는 태도로 임할 수 없다. 예컨대 생태위기나 절대빈곤, 전쟁과 같은 문제들 말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떠한가. ‘보이지 않는 주먹’에 너무나 잘 적응한 나머지 서구식 민주주의를 우리 자신의 창안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프란츠 파농이 살아있었다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그리고 아이티에 파병하는 우리를 지켜보면서 아마도 <누런 피부, 흰 가면>이라는 책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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