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경 / 철학아카데미 상임연구원

현대인은 나쁜 짓보다 촌스러운 짓하기를 싫어한다. 현대인의 ‘윤리’는 종교나 관습, 법이 아니라 ‘미학’적인 기준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오늘날의 미적 영역이란 이미 상품미로 획일화되었다. 자발적으로 예술적 삶을 구성하는 기술인 ‘존재미학’이 현대인들에게 대안적 윤리가 될 수 있을지 고민해 본다. <편집자주>

 

 플라톤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전통 사유 체계를 일컬어 ‘동일성의 철학’이라고 한다. 동일성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항상 불변의 참 존재’로 정의할 수 있는데, 현실 세계에서는 이와 같은 동일성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에 플라톤은 ‘항상 불변의 참 존재’로서 이데아라는 추상물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이렇게 플라톤에서 시작된 동일성의 철학은 이후 서구 형이상학의 큰 줄기를 형성하며 서양 철학의 역사 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가게 된다. 한편 동일성의 철학에 반대해서 등장한 것이 ‘차이의 철학’이다. 차이의 철학은 전통 형이상학에서의 주장처럼 동일성이 차이를 낳는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동일성이 차이에 의해 구성된다고 본다. 이와 같은 차이의 철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구조주의에서부터이며, 구조주의 이후로 등장한 것이 바로 들뢰즈의 ‘차이생성(differentiation)’을 기반으로 하는 ‘생성 존재론’이다.

 

생성 존재론의 상징적 개념쌍

서구의 전통 형이상학은 초월성의 사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초월성의 사유란 존재의 근원이 되는 원리(이데아나 신, 법칙과 같은)를 찾아내고 그것으로부터 모든 존재를 설명하는 사유방식을 말한다. 다시 말해 모든 사유의 근원을 삶의 외부에 두고 있는 것이다. 반면 들뢰즈의 생성 존재론은 삶의 외부에서 존재의 근원을 찾는 것이 아닌 삶 그 자체를 창조적 역능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이른바 내재성의 사유 형태를 갖는다. 따라서 생성 존재론은 외부의 존재인 동일성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자체적(내부적)으로 창조의 원천이 되는 발생적 요소들에 의해 스스로 창조해 나간다. 그 원리가 다름 아닌 차이생성을 기반으로 하는 생성 존재론인 것이다. 이 원리는 개체들을 지칭하는 기계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서 기계란 부품처럼 그 자체로는 단일한 속성이 없으며 ‘접속’과 ‘배치’를 통해 성격이 달라지고 기능이 규정되는 무규정의 실체들이다. 이 낱낱의 기계들은 각각 접속을 통해 배치를 이루게 되고 배치를 통해 ‘영토화’를 이룬다. 그리고 배치에서 벗어나는 것을 ‘탈주’라고 하는데 탈주를 통해 배치가 풀리는 탈영토화를 이루기도 한다.

모든 기계들은 그 자체로 ‘욕망(차이를 생성하는 역능이자 생명)’을 본성으로 하므로 언제나 탈주선이 흐른다. 따라서 어떠한 접속에도 탈주선이 허용된다. 기계-접속-배치-영토화-탈영토화-재영토화의 라인은 바로 생성 존재론의 원리라 할 수 있으며 이 원리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공저 <천의 고원>에서 전통사유와 배치를 이루는 여러 개의 상징적인 개념쌍(수목형 사유와 리좀형 사유, 홈 패인 공간과 매끈한 공간, 정주성과 유목성 등)으로 등장하고 있다.

모든 존재가 하나의 중심(一者)으로 환원되는 전통 형이상학의 초월적 사유는 모든 뿌리들이 하나의 중심뿌리로 귀착되는, 다시 말해 하나의 뿌리를 중심으로 모든 뿌리들이 뻗어가는 ‘수목형 사유’체계인데 반해, 비중심화된 체계 속에서 발생과 변형을 존재의 특징으로 하는 생성 존재론은 중심뿌리없이 줄기 자체가 분기하여 각각 뿌리 역할을 하는 ‘리좀형 사유’체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중심이 제거된 리좀(rhizome)은 비유기적으로 단절된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들 간에 직접 접속하는 열린 체계를 이루며 접속되는 항들이 늘거나 줄어듦에 따라 성질이 달라지는 가변적 체계이다. 따라서 단일한 속성이 없고 비유기적인 기계들이 접속을 통해 배치를 이루고 접속에 따라 그 성질과 차원수가 달라지는 생성 존재론의 원리를 그대로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홈이 파인 공간에 물을 떨어뜨리면 물은 파여진 홈을 따라 흐를 것이다. 그러나 매끈한 공간에 떨어진 물방울은 무정형의 그림을 그리며 사방으로 흩어져 갈 것이다. 이처럼 ‘홈 패인 공간’이 일정한 규칙과 질서가 존재하는 규정된 공간이라면 ‘매끈한 공간’은 어떠한 규칙도 질서도 없이 사방으로 열린 무규정의 공간이다. 이는 씨실과 날실이 일정한 규칙에 의해 짜여지는 직물과 압축에 의해 털이 무질서하게 얽힘으로써 천이 만들어지는 펠트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일정한 테마를 가지고 공간에 질서와 연속성을 부여하는 자수와 부정형의 천 조각을 자유로이 늘어놓고 짜 맞추는 패치워크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매끈한 공간이란 표면의 껄끄러움에 반하는 매끄러운 질감, 즉 등질(等質)의 공간이 아닌, 무질서와 무규정을 상징하는 부정형(不定形)의 공간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유목민들은 성곽이나 담을 쌓고 상주하는 정주민들과 달리 가축을 방목하면서 물과 풀을 찾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생활형태를 가진다. 따라서 유목민들은 정주민들이 이루어 놓은 닫힌 공간 안에서의 모든 규범과 질서에 구애됨이 없이 늘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는 속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유목’이라고 하는 생활형태는 물론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이리저리 이동하는 습성을 가지나, 그렇다고 해서 되는대로 무작정 떠돌아다니는 것은 아니다. 유목민들도 느슨하지만 나름대로 정해진 영토 안에서 자연의 변화 등에 의해 관습화된 일정한 궤적을 따라 이동한다. 유목민이 정주민과 다른 점은 영토를 점유하고 상주하는 것이 아닌 일정 기간 머물렀던 지점으로부터 항상 떠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목민에게 있어서 머무는 모든 지점은 중계점으로만 존재하며 거주라는 개념도 그들의 궤적을 따라 끊임없이 이동한다. 그들은 그들의 이동을 전체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이동을 반복해가면서 차례대로 여정을 병치해 가는 방법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유목민의 거주는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는 ‘국지적 통합’으로 존재하며, 접속들과 방향 변화들을 무한대로 연속시켜 매끈한 공간을 구성해 간다. 이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들 간에 직접 접속을 통해 열린 체계를 이루어 가는 리좀이자 생성 존재론의 원리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유목론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민처럼 새로운 영토를 창조해 나가는 과정으로 어떠한 고정관념에도 머물지 않고 끝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열린 세계로 나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유목론은 장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전통적 규범과 질서가 지배하는 ‘홈 패인 공간’으로부터 ‘매끈한 공간’을 열며 부단히 탈주를 시도해 온 반전통적 사유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있어서 인류의 의식을 지배하는 홈 패인 공간, 수목형 사유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포장해버리는 가공할 자본의 논리이다. 얼마 전 매스컴 상에서 크게 물의를 빚었던 ‘루저’ 발언 역시 이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한마디로 외모지상주의가 판치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단적으로 대변해주고 있는 하나의 해프닝인 것이다. 사람의 외모에서 학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의 잔뿌리들이 돈의 회로를 타고 모여드는 거대한 중심뿌리! 바야흐로 군주와 교황이 차지했던 존재의 옥좌를 ‘돈’이 차지하는 시대가 도래하고야 만 것이다. 누군들 이 도도한 자본의 흐름 속에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러므로… 달아나라! 양 둑을 무너뜨리고 중간에서 속도를 내는 시냇물처럼, 매끈한 공간 위를 달리는 물방울처럼, 땅 밑을 수평으로 기어가는 리좀처럼, 이동과 동시에 지워지는 유목민의 영토처럼, 달아나라! 떨어져 산산이 흩어지는 진주알처럼, 하나의 줄에서 벗어나 여러 개의 몸으로 달아나라. 되도록 중심에서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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