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인경 / 로드스쿨러

공자는 아는 것이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이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말한다. 즐기며 공부하는 태도는 삶의 모든 순간에서 적극적으로 배움을 얻고자 하는 로드스쿨러들의 지향점과 일치한다. 분과 학문의 틀에 갇혀 무의미한 공부를 반복하는 대학원생이라면 로드스쿨러의 역동적인 공부 경험담이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올 것이다. <편집자주>

 

내복 없이 돌아다니다간 덜덜 떨기 딱 좋은 계절입니다. 이런 날씨에 아랑곳없이 돌아다니는 사람들 중엔 시린 솔로 가슴에 염장 지르는 커플들 말고도, 몇 번을 까이건 구애를 멈출 수 없어 오늘도 사랑하는 그 녀석을 좇아 삽질구애담의 한 페이지를 늘리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그 지치지 않는 껄떡쇠(?)들이 바로 로드스쿨러입니다.

‘로드스쿨러(Roadschooler)’란 배움과 스승을 찾아 다양한 공간을 넘나들며 학습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가슴 뛰는 진짜 앎에 반해서 앎이 있는 곳이라면 경계를 넘나들며 어디든 찾아가는 이들은, 사실 돌아다니며 구애 작전을 펼치기 전엔 헛헛함과 외로움을 느꼈던 사람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돌아다니기 전에는 그들도, 일정한 공간 안에서 일정한 커리큘럼과 교재를 갖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성인·남성·단일 민족·비장애인·엘리트·이성애자·중산층 이상·서구 중심·서울 중심의 시각을 바탕으로 설계되고 구성된 공간과 공간의 룰 안에서 이를 중심으로 사고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다양한 정체성의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소외를 느낍니다. 그리고 만성적인 열등감과 무력감에 연애질의 즐거움을 깜빡하거나, 애초에 연애질이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아, 나도 내 심장이 있는데, 내 심장을 진짜 뛰게 하는 말을 듣고 싶고, 내 삶이 아닌 앎을 억지로 습득하는 게 아니라 내 삶에 바로 적용 가능한 그런 앎 속에 살고 싶은데, 뭐 방법이 없을까?’라고 고민하던 이들은 자신을 외롭게 방치하는 공간에 속해 있길 그만둡니다. 그리고 앎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다는 유랑 껄떡쇠의 정체성을 택하면서 로드스쿨러라고 묶을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겨난 거다, 라고 한 때 공간 안에서 많이 외로웠던 저는 생각합니다.

 

앎이 삶을 배반하지 않으려면

 로드스쿨러들은 특정한 공간에 속해 있는 몸이 아닙니다.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이나 스스로 배우고자 하는 내용이 공간의 룰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진짜 하고 싶었던 공부를 애써 뒤로 미루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들은 공간이 인정한 공부 외에도 ‘먹고 자고 입고 싸고 일하고 사랑하는 일상의 삶을 어떻게 더 행복하고 기름지게 만들 수 있을까’를 화두 삼아 삶 전체를 앎과 탐구의 영역으로 놓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일상의 활동들 가운데 책을 들여다보며 공부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활동으로 놓는 식의 위계(주로 학교, 기업, 국가 등 공간을 지배하는 권력이 설정해 놓은 위계)를 갖지 않고 밥 짓는 것, 머무는 공간을 청소하고 가꾸는 것, 주위 사람을 돌보는 것, 사람들과 징하게 수다 떠는 것 등을 책 들고 공부하는 것과 동등하게 대합니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집 반찬이 어디에서 온 재료로 만들어진 건지도 잘 모르며, 나와 정체성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그들과 수다를 떨며 공부하지 않을 때, 다시 말해 앎이 일상을 반영하지 않을 때 ‘앎이 삶을 따돌리고 삶이 앎 앞에 외로워하는’ 일이 생깁니다. 앎이 내 삶에 맞춤처럼 들어맞을 때 공간 안에서 느꼈던 무력감이 옅어지면서, 내 삶을 창의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겠다는 삶의 활력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제 발에 꼭 맞는 신을 신고 뛰는데 나는 내 발보다 너무 크거나 작은 운동화를 신고 뛰어야 한다면 불안과 열등감 속에 어느 정도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레이스에 임할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내 발에 꼭 맞는 운동화를 신고 내 체형에 가장 잘 맞는 방식대로 뛸 수 있다면 유감없이 제 기량을 발휘하면서 앞으로 쭉쭉 뻗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잘 맞는 운동화를 신고 신나게 달리는 듯한 삶의 활력을 찾고 싶다면, 로드스쿨링은 정말 더 없이 좋은 맞춤 운동화 제작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로드스쿨링에도 어려움은 있는데요. 학교, 기업, 국가 등이 인정하지 않는 앎을 포함해서 공부하기 때문에 이들의 공부는 입시나 취업 등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도로부터 공부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 거죠. 그러다보니 로드스쿨링을 하는 친구 중엔 로드스쿨링을 하기 위해 여행할 때마다 어렵게 학교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하거나 못 가는 친구도 있고, 로드스쿨링만으로는 취업이 어려워서 사회에서 인정하는 대학 생활을 병행하는 친구들도 있지요. 이 과정에서 많은 불편함과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삶의 경계에서 만나는 궁극의 공부

사람도 자본도 지식도 경계를 넘나들며 이동하는 시대에 교육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시대에 적합한 사람을 키우는 데 있다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학습 내용과 방법 면에서 이동이 곧 삶인 시대를 반영하려는 노력이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학습 내용에 다양한 공간을 넘나드는 이동에 대한 성찰을 넣고 학습 방법의 이동이라는 장점을 적극 결합한 학습 방식인 로드스쿨링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알맞은 학습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초중등 교육 과정에서 정적인 공간 중심의 교육이 가질 수 있는 한계를 수학여행 및 방과 후 특별 활동, 유연한 야외 수업 허가제 등과 로드스쿨링을 결합해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학에서도 공부의 의미를 확장해서, 굳이 강의실에 앉아 교수님의 강의를 듣는 게 아니더라도 학생 본인이 택한 삶의 현장에서 탐구한 결과물을 수강 신청한 강의에 녹일 수 있도록 로드스쿨링에 대한 허가제도를 잘 정비한다면, 앎과 삶이 서로 통하지 않아 옆구리 시려하는 학생들에게 앎과 살을 맞대는 제대로 된 연애질의 축복이 함께 하지 않을까 합니다. 앎과 삶을 일치시키기가 너무나 어려워진 시대에도 참된 앎을 꿈꾸는 모든 분들께 궁극의 연애질이 가져다줄 수 있는 황홀한 기쁨이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