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 본교 前 교직원

연구사회는 ‘대학’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형성되고 발전한다. 이번 특집호에서는 이러한 대학이라는 공간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고찰하며 이상적인 대학의 모습을 고민해본다. 또한 교수와 제자 간의 권위주의적 관계를 탈피한 모범 사례를 만나봄으로써 새로운 교수-제자 관계 형성의 가능성을 모색해본다. <편집자주>

 

나는 개인적으로 대학생이던 시절 동안 한국의 개발독재과정과 그로 인해 죽거나 다쳤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배웠다. 그리고 지금 사회인으로 살아가면서도 도시개발에서 벌어지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귀를 세우고 살고 있고, 때로 필요하면 적극적으로 행동 하기도 한다. 작년에 있었던 촛불집회 때도 나는 많은 시간을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했다. 그러한 내게 많이 아쉬웠던 건 첫 촛불을 든 이들이 중학생들이었다는 점이다. 대학생들은 어디로 갔나. 그러한 느낌을 받았던 나는 한국에서 대학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었을 때, 그 답을 하기는 매우 쉬울 수밖에 없었다.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대학은 단지 취업학원일 뿐이지 않은가라고 말이다. 하지만 만약 문제가 있다면 왜 그러한지, 그리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면 답하기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그건 어찌 보면 우리사회의 무교양주의와 싸워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이면 다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렇게 사람에 대해서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 있을까. 그렇다면 대학에도 똑같은 말을 써보자. “대학이 대학이면 다냐, 대학이 대학다워야 대학이다.” 지금 우리의 대학은 정말 대학다운 대학일까.


사회가 변하니 대학도 변하더라


현재 우리사회는 절대적인 진리를 상실했고 때문에 모든 것은 다 상대적인 것이 되었다. 진리의 가치 또한 그렇게 변동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인 대학도 이런 변화와 상관없을 수가 없다. 본교에 재직 중이던 시절, 구내서점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종합대학에 위치한 서점이라고 말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한산했기 때문이다. 물론 구내서점이 한산하다고해서 우리 대학생들이 정말로 책을 안 읽는다고 비약할 수는 없겠지만, 실제로 8년 간 본교에서 일을 하면서 그게 비약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실용과 효율을 중요시 여기는 사회가 되면서부터 시작된 변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대학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정할 수 없다. 학교는 스스로 사회가 바라는 인재를 배출하고, 학생은 그런 인재가 되어야만 하는 압박을 받고 있다. 이제 대학은 ‘교양인’이 아니라 ‘기능인’을 사회에 공급해주어야 할 존재로 자리 잡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회가 기능인을 요구하면서 대학은 그 변화를 일방적으로 수용했다. 그 결과 서점에는 대학생이 사라졌고 거리 집회에도 대학생이 사라졌다. 재직 중이던 몇 년간 꾸준히 본교가 변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가장 신경이 쓰였던 부분은 약대 앞의 공간이나 도서관 옆 공터와 같이 비어있던 공간들이 학교 정책에 의해 무언가로 채워지는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논의하듯이, 이는 학생들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지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보다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이러한 변화에 대해 학생들이 별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종종 학교 안의 공사장을 지나가는 학생들을 붙잡고 이런 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너희 의견을 이야기하고 주장할 수 있는 장소가 점점 사라진다는 것인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러나 별 반응이 오는 경우는 없었다. 이러한 학교의 변화는 사회적 분위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일례로 광화문에 위치한 동아일보사 앞은 예전만 하더라도 무수히 많은 집회가 열리던 광장의 기능을 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어느샌가 그 앞에 이것저것 장식물이 만들어지면서 더 이상 사람들이 모일 수 없게 되었다. 사회가 빈 공간을 채움으로써 공론장을 없애자, 대학도 똑같은 방식으로 공론장을 없애고 있다. 이제 학생들은 도서관 근처에서 무언가 시끌시끌한 일이 생기면 공부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불편함을 호소한다. 학생들에게 학교는 조용해야 하는 곳이 되었다. 시끄러움을 허용해줄 수 있는 순간은 오직 아이돌 스타가 찾아오는 축제의 시간뿐이다.


살아있는 대학을 위해

 

 잔디밭에서 자유롭게 토론을 즐기는 U.C. Berkerly의 학생들
 잔디밭에서 자유롭게 토론을 즐기는 U.C. Berkerly의 학생들


하지만 대학이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는 것일까. 사회가 무너뜨리는 구성원들의 의식을 되살리기 위한 방안은 어떤 것이 있을까. 나는 대학이 지역사회와 지역경제에 먼저 손을 내밀어보는 것이 어떨지 생각한다. 문화공동체, 경제공동체로서 대학이 지역과 같이 살아갈 수 있는 대학으로 변화를 도모한다면 오히려 대학이 사회변화를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본교가 속해있는 흑석동이 재개발을 시작했다. 재개발이 끝나고 나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흑석동에 모이게 될 것이고, 그에 따른 인프라도 늘어날 것이다. 이를 대학의 연구에도 도움이 되고 지역사회에도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활용한다면 대학이 다시 주체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하인리히 뵐은 “언어는 자유의 마지막 보루”라고 말했다. 파시즘과 전쟁을 겪으며 황폐화된 독일이 정신적, 물질적 상처를 딛고 일어서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언어라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사회일수록, 대학일수록 그 미래가 밝다는 뜻이다. 한두 사람의 의견만으로 대학의 앞날이 결정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노력하자. 살아있는 대학은 그런 것들을 고민하는 곳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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