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현숙 / 사회공공연구소 상임연구위원


자본주의의 겨울나기 : ⑤고용창출의 해법
고용상승은 경제 선순환의 지름길이다. 특히 사회공공서비스 정책도입은 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으면서도 고용을 창출할 수 있는 분야로 주목받고 있다. 최근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사회정책인 ‘기본소득’ 담론을 통해 한국의 현실에 적용가능한 사회정책에 대해 사고해본다. <편집자주>

  우리는 열심히 일한다면 누구나 잘 살아갈 수 있고,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해야만 한다고 배웠다. 더욱이 타인보다 더 잘, 더 열심히 일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경쟁논리 속에 성공에 대한 동경을 품은 채 어른이 되어왔다. 그러나 성인이 된 사람들은 난감한 현실에 직면하곤 한다. 누구나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반드시 잘 살게 되지만은 않고, 더욱이 이제는 노동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일자리가 예전만큼 유지되지도 않는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 다른 세상에서 노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자본주의 국가는 노동세계 내부의 대상과 노동세계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을 구분해서 사회정책을 발전시켜왔다. 노동세계 내부의 대상인 노동자에 대해서는 19세기 말부터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사회보장제를 발전시킨 반면, 노동세계로부터 배제된 대표적인 집단인 빈민과 실업자에 대해서는 17세기 구빈법과 18세기 스핀햄랜드와 같은 구빈제도에서 현재의 공공부조로 발전시켰다. 이처럼 사회정책은 ‘노동’을 매개로 제도의 대상과 급여의 내용이 구분돼 도입되어 왔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어떤 조건을 전제로 사회적 급여(social benefit)를 줄 것인가’는 사회복지 역사상 아마도 가장 오래된 질문이자 기준이었다. 노동시장으로부터 소득을 버는 사람들에게는 ‘사회적 위험’을 예방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 보편적 원리에 기반을 둔 소득보장 제도가 운영된다. 반면 노동시장 외부에 있는 대상자에게는 선별적 원리에 입각해서 급여를 위한 노동의무를 부과한다. 실업자의 경우 취업을 위한 노력을 증명해야만 하고, 빈곤층의 경우 노동능력의 유무로 구분을 두어 노동능력이 있는 경우 반드시 일을 해야만 사회적 급여를 받을 조건을 충족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급여의 수준은 일반 노동시장에서 형성된 최저임금보다 항상 낮아야 한다는 열등처우의 원칙이 19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렇듯 이제까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노동력을 팔아서 생계를 해결하든가, 노동력을 팔 수 없는 경우에는 노동능력을 매개로 하여 사회적 급여를 제공받아 왔다.

 

노동연계복지의 실패와 기본소득의 부상


  소득보장 중심의 고전적 복지국가들은 포스트포디즘 시기부터 신자유주의라는 심각한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탈산업사회로의 전환, 자본의 지구화, 냉전체제 해체와 같은 변화는 산업입지경쟁을 극대화시켜 민족국가단위의 사회정책과 사회적 합의구조를 매우 위축시켰다. 포디즘 시기에 준수되었던 사회적 합의나 노동조합과의 합의는 자본에게 불필요한 요건이 되었고, 자본은 전 지구적 차원으로 자유롭게 이동하게 되었다. 민족국가들은 자본을 더 많이 자국으로 유치하기 위해 사회복지 및 노동비용을 축소시키는 친자본적인 정책을 펼쳐왔다. 그 결과 다양한 복지국가체제에서 공통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복지(welfare)에서 노동연계복지(workfare)로 전환, 국가의 개입보다는 시장의 확대, 국가의 역할이 시민에 대한 소득보장보다는 시민 개인의 책임 및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역할로 전환되었다. 문제는 근본적으로 실업문제가 현재의 산업구조에서 해결되기 어렵다는 점과 저임금의 나쁜 일자리가 확대되고, 비정규직이 전체 고용형태의 절반이상을 차지하게 되면서 시민들의 소득은 향상되기보다는 오히려 감소했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이후 개혁된 공공부조 및 실업 지원의 조건은 더욱 엄격해졌고, 복지권리가 시민권으로써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시대에 도래했다. 임금을 통한 소득보장이 불안정한 상당수의 시민들에 대한 복지권이 어떻게 유지되고 확대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제기로부터 출발된 다양한 대안적인 복지 담론 중에서 ‘기본소득’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기본소득이란 ‘심사와 노동요구 없이 모두에게 개별적이면서 무조건적으로 지급되는 소득’을 말한다. 즉 급여자격을 위한 조건이 되었던 자산조사, 노동능력여부, 기여여부와 관련 없이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을 국가가 지급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시민에게 똑같은 수준의 급여가 동등하게 지급되고 이때 소득 수준이나 성별은 고려대상이 되지 않지만 연령에 따른 급여차이는 존재한다. 또한 가족 단위 지급이 아니라 개인별로 매달 일정 금액을 지급하게 된다.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촉발된 배경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신자유주적 사회정책이 심화된 빈곤과 양극화의 문제를 양산할 뿐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또한 실업 및 비정규직 증가 등으로 변화된 노동시장, 기술적 진보와 생산성 향상으로 증대된 부에 대한 공정한 사회적 분배, 새로운 일자리 창출은 어렵지만 생산성은 충분히 확보되었다는 입장에서 전 시민에 대한 기본소득의 관점이 제출되었다. 유럽에서는 1986년 판 더 벤과 빠레이스가 공동으로 작성한 <코뮌주의에 이르는 자본주의적 길>에서 기본소득이 언급되기 시작하였고, 한국에서는 2002년도 윤정향이 <기초소득의 도입 가능성 연구>로 처음 소개한 이후 곽노완의 논문 등으로 논의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기본소득은 기존 소득보장제도의 병폐였던 노동과의 연계성을 모두 끊어냈다는 점에서 매우 참신하다. 요즘 광고에서 나오듯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당연히 받을 권리’가 부여되는 것이다. 또한 급여의 수준 역시 자유주의자들의 부분적 기본소득과는 차이를 두어 적정수준까지 향상시킨다는 것을 목표로 둔다. 그런데 이렇게 매력적이고 획기적인 대안 모델이 불편한 이유는 무엇일까.

 

돈만 좀 더 생기면 우리는 행복해질까?
 

  노동과의 연계성을 끊는 급여제공이라는, 조건 없는 기본소득의 구상은 새로우면서도 새롭지 않다. 노동연계복지가 강화되면서 이를 반대하는 그룹들은 조건부 수급 및 노동연계성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해왔다. 이들은 빈민과 실업자를 대변해 조건 없는 급여의 필요성을 역설해 왔다. 기본소득은 빈민과 실업자 뿐만 아니라 전 국민를 동일하게 지원한다. 이는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취급하여 사람들의 욕구나 능력의 차이 없이 사회적 자원을 똑같이 분배하는 ‘수량적 평등’의 원리에 입각한다. 가장 적극적인 평등이긴 하지만 현재 신자유주의로 인해 여러 가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대상자 중심이 아닌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재분배 전략의 필요성은 동의되기 힘들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수량적 평등은 항상 최저 수준의 급여로 결정되었다는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밖에도 체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재원 확보 및 정당성 문제, 노동유인성과의 관계, 임금 및 노동유연화에 미칠 상관성, 현금급여가 시장에 미칠 영향, 기존 제도와의 연계성 등에서 설득되기 힘든 요소들이 많다. 무엇보다도 생산체제 전환에 대한 고려 없이 재분배 기능만으로 인민들의 삶이 보다 향상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에 부딪힌다. 케인즈주의적 개입국가가 완전고용을 중심으로 유효수요를 관리했다면, 기본소득은 고용과 상관없는 수요의 창출일 수도 있다. 또한 노동소득 이외의 일정 수준의 급여가 생긴다면 없는 것보다는 분명 좋아질 테지만 그것이 노동으로부터, 생산관계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정책은 야누스의 얼굴과 같다. 한편으로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수단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적 수단이기도 하다. 기본소득이 후자로의 전망을 갖기 위해서는 비설득성의 부분이 채워져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대안으로서의 설득력을 획득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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