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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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사유의 레드바이러스, 지젝을 말하다대담: 이성민 & 이현우
한우리 편집위원  |  dkgkaa@cau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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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호]
승인 2009.12.02  01: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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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하는 세계정세와 신자유주의로 인한 자본주의의 위기는 지식인의 현실참여를 고민하게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참여방식과 방향에 대한 고민일 것이다. “마돈나가 싱글 앨범을 발표하는 것보다 더 정기적으로 책을 발표”하는 우리 시대의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사유를 통해 이 시대에 ‘공부를 한다는 것’의 의미와 ‘지식인의 자세’에 관해 고민해본다. <편집자주>

 

   
 
 

●대담 일시 및 장소: 2009.11.19, 서울대입구

●대담자 이성민: 도서출판b 기획의원, 난곡연구소의 연구원이자 지젝 전문 번역가
 이현우: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이자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 운영중

 
 


‘공부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고, 지젝을 읽는다는 것이 ‘공부’라는 행위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이성민 제가 요즘 세대를 보면 확실히 조금만 어려워도 책을 못 읽더라고요. 지젝이 이런 독서능력 부족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젝 책을 읽다보면 난해하면서도 끝까지 읽게 하는 매력이 있거든요. 헤겔이나 칸트 같은 다른 사상가들을 매력적인 누군가로 만들기도 하고요. 심지어 진지한 학문접근 대상이 아닌 영화나, 광범위하게 말하면 현실에 대해서 ‘여기 무언가 읽어내야 할 것이 있다’는 마음을 갖게 하니까요. 이런 읽어내고자 하는 욕망을 갖는 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이현우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매트릭스>에서 빨간 약과 파란 약 중에 선택하는 것처럼 하나의 ‘결단’이라고 생각해요. 80년대에는 독서가 의무이자 부담이었다면, 지금은 독서가 ‘선택’인 것 같아요. 읽지 않는다는 것은 파란 약을 선택하는 것처럼 안온하고 체제 순응적인 상태에 자족하는 거예요. 적어도 대학원생이라면 전투적이고 적극적인 책읽기가 필요해요. 스스로가 강제할 수 없으면 서로가 서로를 ‘갈궈줄’ 수 있는 친구나 선배가 필요한 거죠. 대학원에서도 요즘은 지젝의 ‘관용적 아버지’처럼 “네가 선택해서 공부해라”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포장되기는 자유로워 보이죠. 그보다는 무자비한 선배나 교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제대로 이해 못하면 때려주기도 하는.
이성민 그런 측면에서 지젝이 어떤 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지젝을 발견하기 직전에는 공부에 대한 욕망이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그를 읽었을 때 굉장히 놀랐어요. 새로운 독법이 안 나와서 칸트, 헤겔이 이미 낡은 어떤 것으로 간주되고 있을 때, 지젝이 그들을 다시 읽어 근본적 물음을 끄집어내는 방식이 굉장히 흥미롭다고 여겼거든요.
이현우 저도 공감하는 부분이에요. 비평이란 게 다시 읽도록 요구하는 것이거든요. 아감벤이 말하듯 현재 ‘정치’ 내지는 ‘정치적 행위’의 의미가 사라져가고 있고, 지젝은 그게 ‘행정’으로 대치된다고 표현해요. 그건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설명하는 개념적 범주가 다 낡아빠져서 현실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해내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지시대상이 텅 비어있어요. 그러니까 새로운 개념을 창출해야 되죠. 그런 개념창출이 저는 공부라고 생각해요. 또 그런 걸 도와줄 수 있는 멘토를 찾는 게 중요하죠. 아감벤이든지 지젝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일깨워주고 자신을 다음 단계로 끌어줄 수 있는 역할. 사고의 바이러스 역할이랄까요. 신종플루 걸리면 열이 나듯이 맹렬하게 공부하겠다는 자극을 주죠.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공부의 절박함’이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이현우
지금의 정세 속에서 사고하지 않으면 자신의 현실을 극복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죠. 사르트르가 드는 예가 있잖아요.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는 편모슬하의 아들이 ‘어머니를 모셔야 하냐, 활동을 해야하냐’고 질문하니까 사르트르는 ‘네가 선택하고 책임져라’ 그렇게 답변하는데, 지젝은 ‘너의 어머니한테 가서는 레지스탕스활동을 해야 한다고 하고 레지스탕스에 가서는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고 그래라. 그리고 도서관에 가서 공부해라.’ 그러니까 거기에 실려 있는 것은 굉장히 절박한 선택이에요. 레지스탕스 운동과 맞먹는 공부이고 어머니를 혼자 보살펴야 하는 그 절박함을 견딜 수 있는 공부죠. 도피적인 공부나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아니라 그 책임을 최대한으로 끌어안기 위한 공부이고요. 대학원생이 현실에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게 필요해요.

 

그렇다면,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이현우
레닌이 나폴레옹을 인용하면서 한 말이 “알기 때문에 행동하는 게 아니라, 행동하면 알게 된다”는 거죠. ‘공부해야지’하고 10개년 계획과 마스터플랜 세워서 공부하는 건 난센스고, 일단 하나 닥쳐서 해보면 그 다음에 어디로 가야할지 알게 되요. 그게 일상과 유리되지 않는 공부겠죠. 공부를 하다보면 공부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바뀐 생각이 새로운 공부로 자신을 이끌어주는.
이성민 계속 공부를 한다면 앞으로 정치계나 연예계가 아니라 학계에 소속될 텐데, 이곳에 남아서 나와 같이 공부를 하는 사람들과 흥미로운 논쟁과 토론을 하며 살 거라면, 다른 곳에 뭐가 있을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해요. 특히 정치 쪽에 너무 관심을 갖지 말라고 충고해주고 싶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학계가 이 모양이기 때문에 정치가 저 모양인 거예요. 학계나 정치가 각자의 할 몫이 있는데, 정말로 공부를 할 사람이라면 나를 기준으로 학계를 판단해야 돼요. 그 정도의 주체성이 있어야죠. 학계의 무엇이 문제고 학자들이 무엇을 공부하지 않고 있는지를 살피면서 자신이 해야할 일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해요
이현우 전 초점이 약간 다른데요. 학문과 공부를 구별을 해서 본다면, 제도권 대학에서의 ‘학문’과 달리 ‘공부’는 모두가 해야 하는 것이라고 봐요. 비단 적응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저항하기 위해서도 책을 읽고 사유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공부가 더 왕성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이거든요.
이성민 그건 다른 말로 하면 학계의 기능은 포기하겠다는 게 아닌가요? 특히 인문학이요.
이현우 흔히 전공자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 게 사실 어떤 직업을 얻기 위한 공부를 요구하죠. 특히 논문 편수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는데, 전 그런데서 좀 자유로울 수 있는 어떤 공부가 필요하다고 봐요. 보드리야르 식으로 말하면 ‘내파적인 공부’죠. 영문학 한다면 반영문학적인 영문학 같은. 지금 학계에서는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이성민 선생님과 제가 좀 관점의 차이가 있는 거 같은데, 오늘날 대학이 형편없다는 것은 저도 인정하는데, 본디 학문의 이념이 그런 것은 아닐 거 아니에요. 오늘의 학계가 그런 학문의 이념을 놓치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는데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대학이 아니라(다른 것이 필요하다)고는 동의하지 못하겠어요.
이현우 대중지성이란 말도 쓰고 그러잖아요. 저는 소수에 의해 독점되고 관리되는 학문으로서의 공부상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소위 인민주권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민들이 주권자로서의 학습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 교양이나 독서 같은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봐요. 물론 전문적인 영역의 공부가 필요하지만, 그걸 떠받칠 수 있는 평균수준의 일반 대중의 공부도 필요하고, 그 거리는 좁을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가령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는 모두가 다 아는 작가잖아요. 그런데 그에 관한 논문을 소수 전문가들만이 읽고 토론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일까 싶어요. 누구나 읽는 작품이라면 그에 관한 논의도 일반화되어야 한다는 거고 그러자면 ‘위’에서도 조금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봐요.
이성민 어떤 전문적 지식인 집단이 있고, 이들이 고급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폐쇄적이기 때문에 아래와 소통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그 모든 가정의 전제는 ‘위’가 존재한다는 것인데, 제가 보기엔 그런 것은 없다고 보거든요. 
이현우 그건 이성민 선생님 기준에서 그런 거고, 일반 대중들은 박사, 그러면 굉장히 권위있는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이성민 그래서 번역을 해야 되요. 들뢰즈와 바디우와 지젝을 번역해야 되는 거죠.

 

지젝은 우리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실제로는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점을 숨기기 때문에 ‘수동적인 철회’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또 ‘행위’를 통해서 현실을 돌파해야한다고도 말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접합될 수가 있을까요?
이현우
얼마 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임시노동직이 한 달을 일하고 해고됐어요. 몇 사람이 이걸 문제로 지적했고 알라딘 불매운동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저는 불만스러웠던 게, 사실 지금의 한국사회가 다 그렇게 되어있잖아요. 그런데 굉장히 놀랍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거예요. 알라딘에 항의를 하고, 이것부터 고쳐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이게 웬 순수한 가장인가, 이게 과연 시급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성민 그럼 결과는 악으로 나타나겠죠. 시작은 선이지만. 지젝의 말마따나 하면 할수록 악화된다고, 제발 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이전에 신문불매운동을 했을 때 가장 손해를 본 곳이 제가 알기로는 <경향신문>이에요. 광고주들이 광고를 특정 신문사만 안하는 게 아니라 신문사 전체에 안하기 때문에.
이현우 그러니까 ‘나는 옳은 행동을 할 테니 뒷감당은 니들이 해라’는 식은 안 되는 거죠. 전략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어요. 선한 행동이 항상 올바른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니까. 예를 들어 기부하는 것에도 이면적 기능이 있어요. 전체적인 것에 책임을 지는 것을 고려하라는 거죠. 국지적인 선행이 전체적인 국면에서 오히려 마이너스나 부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거든요. 저는 소위 자칭 급진좌파라고 포지셔닝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답답함을 느끼는데, 그 사람들은 주된 목적이 좌파로서의 자기 정체성의 확인인 것 같아요. 노무현이나 이명박 이나 똑같으니 나빠질 게 없다는 거예요. 이런 생각은 현실에서 놓치고 있는 것이 있죠.
이성민 그렇죠. 정작 떠맡아야 할 것을 안 하는 거죠.
이현우 김규항 씨가 최근 칼럼에서 “너희가 이명박을 욕하지만, 너희 안에 이명박 있다. 삶의 방식이 바뀌지 않는 이상 욕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말했는데, 막상 다르게 사는 게 뭔지에 대한 고민이 없어요. 그러면 아이들 학교를 보내지 말건가? 학원에 안 보내는 정도가 다른 삶인가? 구체적인 상이 없어요. 아주 래디컬한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이란 종 자체가 생태계에 암적 존재잖아요. 가장 좋은 것은 터미네이터처럼 스스로 사라져주는 거죠. 그런데 과연 그런 선택지를 얘기하는 거냐. 대한민국에 저항하는 극단적 방법 중 하나가 자살하는 거 아녜요. 산다는 거 자체가 타협이죠. 무엇이 정말 급진적인 선택인가, 상이 없는 상태에서 자기 확인의 포즈만 잡는 것은 문제라고 봐요.


지젝은 민주주의의 본질이 격차와 차별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이라고 보고 있는데요, 이런 시각에서 우리 사회에 당면한 현실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 개입이 이뤄질 수 있을까요?
이성민
민주주의는 어떤 막다른 곤궁이기도 한데, 정신분석에서는 곤궁의 지점이 바로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기회의 지점이라고 보고 있어요. 저는 우리 사회에 라캉과 지젝처럼 일종의 ‘사회적인 정신분석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주체를 탄탄하게 만들지 말고 주체를 자극하는 사람들. 우석훈 씨가 그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현우  그건 우석훈 씨의 본의와는 무관하게… 우리가 그를 일종의 알리바이로 만드는 거죠. 진중권 씨도 마찬가지고, 한 사람에게 그런 역할을 몰아주는 것은 자기의 책임을 면제하는 거예요.
이성민 그건 우리사회에 사회적 분석가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 입지가 굉장히 좁기 때문인 거죠. 그리고 요즘은 말이 힘을 잃은 시대라 그런지 ‘선생’이라는 용어가 욕처럼 부정적으로 쓰여요. 꼰대라고 하나? 가르침을 주는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존중감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것 같아요.
이현우 우리 애가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인데 선생님은 ‘교육 서비스업’을 한다고 생각해요. 마치 과외 교사를 ‘아, 나한테 안 맞는 거 같아’라고 판단하듯 하는 건데, 우리 때는 상상도 못할 일이죠.
이성민 그런데 외적으로 부과되는 권위로서 스스로의 위치를 포기한 것은 잘한 거라고 봐요.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나간 거죠.
이현우 저는 권위적인 어떤 포즈는 필요하다고 봐요. 아까 공부에도 강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듯이, 교사나 부모나 그런 역할을 해줄 필요가 있는데, 그냥 방치해버리는 거죠. 그냥 솔직하게 ‘교사 별 거 아냐, 난 니네랑 똑같아’ 그런 포즈. 저는 노통이 “대통령 못해먹겠다”고 얘기한 게 제일 불만족스러웠어요. 저는 그런 포즈를 취해서는 안 되었다고 생각해요. 뭔가 가장하고 연기할 필요가 있었던 건데, 그걸 싫어했던 거잖아요. 저는 교사도 그게 큰 손실이라고 생각해요. 뭐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처럼 민주적인 학습형태도 얘기하지만….
이성민 그런 포즈를 취하는, 어떤 새로운 주인을 향한 욕망은 있어요. 민주화가 되면 될수록 그런 욕망은 계속 살아남는 건데. 저는 개인적으로 어떤 다른 권위를 원해요. 그런 권위주의적인 권위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 주인이 아니면서 어떤 자극을 줄 수 있는 포지션. 지젝이라면 레닌과 예수가 그런 사람이라고 볼 텐데, 어쨌거나 그런 사람들의 담화가 사회 속에서 일반성을 가져야만 주체들이 변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런 길을 가려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죠. 그거 말고는 개인적으로 별로 뾰족한 해결책이 안보여요.
이현우 해결책이 없는 대신에 낙관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요. 전략적 차원에서의 낙관. 전망이 없다는 것은 다 알지만 그럼에도 낙관하는 태도.
이성민 우울증을 앓는 것 보다는 낫죠(모두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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