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20.9.4 금 14:15
특집
부분을 넘어 전체를 보다우희종 / 서울대 수의과대학 교수
이지원 편집위원  |  gspressljw@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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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호]
승인 2009.12.01  22:2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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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세기에 걸쳐 인류는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루어내고 있지만, 인간이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위험성 역시 급증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 하에 과학기술의 발전이 놓치고 있는 일면들을 보완하기 위한 방안으로 최근 통섭 연구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본 기획에서는 학제 간 통섭 연구의 필요성과 방향을 살펴봄으로써 다시 통합적 인간의 삶을 탐구해본다. <편집자주>

 

 서양의 분석적 환원론에 의해 구성되어 온 근대과학으로는 비환원론적이자 관계 지향적 현상에 접근하기 어렵다. 현대에는 우주로의 여행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주위에서 흔한 아토피 등의 알레르기나 암 같은 다양한 질병이 근대 생명과학으로 곧 해결될 것 같지도 않다. 현대 문명의 근간이 된 근대과학이 내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검토할 시기가 온 것이다. 멀리는 생명체의 관계론적 관점을 가져온 다윈의 진화론, 가깝게는 여러 요소들의 자기조직적이고 창발적인 현상을 다루는 복잡계 과학이 근대 과학의 한계를 보완해 주고 있다. 비환원론적이자 관계 지향적 현상은 창발적 모습으로 나타나기에 단순한 지식의 합도 아니며, 이를 이해하려면 새로운 방법론의 도출이 요구된다. 따라서 환원론적 실증주의에 바탕을 둔 근대 과학의 한계를 넘고자 학자들은 분과학문 간의 소통과 융합을 통한 새로운 통합적 시각을 갖고, 이에 필요한 통합적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이를 위해 최근 ‘통섭’이라는 용어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사회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의 저서 제목인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에서 ‘consilience’를 번역한 ‘통섭(統攝)’이란 말에 대해서는 주의가 필요하다. ‘통제하고 내 것으로 한다’는 의미의 한자어인 통섭은 윌슨의 뜻을 잘 나타낸 번역어이지만, 이 단어에는 일반인들이 받아들이는 것과는 달리 제국주의적 뉘앙스가 담겨있다. 윌슨의 책을 읽어보면 통섭을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등 다양한 분과학문의 소통과 융합으로 이야기했다기보다는 인문사회과학과 종교 등이 생물학으로 수렴되어야 한다는 환원주의의 관점이 드러난다. 환원론적 근대과학의 한계가 노정된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비환원론적 관점과 복잡계적 창발 현상이 연구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 단어가 학문 간의 소통과 이를 통한 인간 지식의 통합적 창출이라는 뜻을 나타내기에 적절한지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왜 통섭인가?

일단 일반인이 받아들이는 의미로서 통섭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할 때, ‘왜 통섭인가?’라는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왜 학문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현대사회에는 자연과학, 인문과학, 사회과학 등 대부분의 분과학문에 과학이란 말이 붙을 만큼 과학이 일상화된 시대이다. 이처럼 다양한 분과 학문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우리는 왜 학문을 하는가. 우리에게 이 많은 분과학문의 의미는 무엇일까.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뒤로 하더라도 결국 모든 학문은 인간의 삶을 위해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인간이란 존재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로 생태계 전체를 뜻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학문은 너와 나라는 우리의 삶과 더불어 생태계 전체를 위해 있는 것이지 학문을 위해 인간이나 생태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삶은 ‘나’라는 생명체가 출발점이 된다. 육체를 지닌다는 면에서 물리화학적인 측면을 지니고, 또 단순한 물질이 아닌 생명현상을 나타내는 측면도 있다. 이 생명현상의 물질적 속성은 생명과학이, 정신적 속성은 인문과학이나 예술이 다루게 된다. 또 각각의 생명체가 집단을 이루고 사회생활을 할 때는 사회과학이 필요하다. 물론 인간이 자연계와의 관계 맺는 양식을 살피기 위해서는 생태학적인 접근도 요구된다. 따라서 인간의 삶은 물리, 화학, 생명과학, 인문, 사회과학이 함께 통합적으로 펼쳐지는 장이다.

그러나 전문화된 분과학문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점차 분화되어 이제는 타 학문과의 소통이 불가능하게 됐다. 같은 ‘인간’을 두고 생물학에서는 대사작용과 자기 복제를 언급하며 진화한다고 말하지만, 예술가에게는 보고 느끼고 표현하는 주체로 언급된다. 서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같은 생명체에 대한 시각과 표현 언어가 이렇게 다르다는 것은 각각의 분과학문의 관점으로 접근할 때 통합적인 생명체로서의 인간과 삶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사회가 전문화되고 분과학문이 발달할수록 분과학문 간의 소통과 더 나아가 분과학문 간의 통합적 시각으로 인간의 삶을 바라보고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결국 과학자는 우리의 삶을 연구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전공 분야만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를 접하고 이해해야 총체적인 인간을 알 수 있다. 학문이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 삶을 다룬다는 것은 말하자면 서로 다름을 수용하는 것이다. 고정관념이나 기존 지식의 틀을 전복할 때 그 학문의 영역은 확대되며 자연과 인간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더욱 넓어지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풍요로움을 위해 분과학문에 머무르기보다는 분과학문 간의 통합적 접근이 요구된다.


삶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

진정한 과학이나 학문은 기존의 관점이나 가치 체계에 도전하면서 그 영역을 넓혀 간다. 이 점을 과학자가 속한 사회에 적용시켜본다면, 본질적으로 과학자는 폐쇄적이거나 머무르려고 하는 사회에 대하여 항상 전복을 꾀하는 진보적 속성을 지녀야 하고, 사회의 고정관념을 전복시키고 낯설게 보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점에서 과학은 문학이나 예술과 연계된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과학자라면 인간의 삶을 고민해야 하며, 삶을 다룬 사회 속의 문학, 예술, 종교에도 관심을 지니고 넘나들며 통합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따라서 대상에 대한 총체적 파악을 위해 분과학문의 소통은 필연적이며, 분과학문 간의 융합도 조심스럽게 시도되고 있다. 이러한 통합적 접근은 자연과학과 인문사회학뿐만 아니라 과학과 예술, 생태주의나 페미니즘과 종교, 철학 및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시도되고 있다. 아직은 동일 주제에 대하여 각 분과학문에서의 시각을 단지 물리적으로 나열한 수준이 대부분이지만, 이러한 시도가 계속되는 한 조만간 질적 변화를 수반한 창발적인 융합 학문이 등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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