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한 / 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한국사회 질병 보고서 : ⑤ 암세포처럼 번져오는, 파시즘
우리 사회를 잠식하고 있는 질병은 무엇일까? 이번 기획에서는 MB정부 집권 이후 우리 사회를 잠식해오고 있는 그늘진 현안들을 질병으로 비유하여 진단하고 분석해본다. 지금까지 살펴본 정부의 자폐적 태도, 대규모 토목공사의 부활, 삶 전반에 대한 통치, 연대의 상실 등의 현상이 과연 현 정권의 파시즘적 징후를 보여주는 것인지 이에 대한 학계의 담론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을 극적으로 보여준 2008년 촛불항쟁 이후 한국의 지식사회는 대략 두 가지 주제에 대해 이론적 검토를 수행하는데, 하나가 민주주의고 다른 하나가 파시즘이다. 촛불항쟁의 주요 흐름 가운데 하나가 대의민주주의의 위기와 쇠퇴를 비판하고,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를 내세워 시민주권을 확립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현실 민주주의의 한계와 이를 극복할 새로운 민주주의를 탐색하는 것은 필수적이고 자연스럽다. 그러나 파시즘에 관한 논의는 그만큼 자연스럽지는 않다. 지난 촛불항쟁에서 파시즘의 징후를 직접적으로 읽어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파시즘 담론의 출현

최근 파시즘에 관한 담론들이 출현하는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한편에는 ‘문민정부-국민정부-참여정부’로 이어지는 이른바 민주정부의 시대가 실용과 발전을 표방하는 이명박 정권, 이른바 ‘08년 체제’로 교체되었고, 이것이 파시즘 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는 비판적 담론들이 존재한다. 즉 이명박 정권에 대한 비판적 차원에서 형성된 파시즘 담론이다. 하지만 이는 과거 민주정부의 ‘민주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그 신자유주의적 성격을 오인할 위험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촛불항쟁이 중간계급 중심의 웰빙 문화와 애국주의에 맞닿아 있으며, 더 멀리는 ‘붉은 악마’의 애국주의적 열광 및 황우석 사건에서 나타난 비이성적 집단주의와 연결되는데, 이것이 파시즘 운동과 유사하다는 비판들이 있다. 즉 대중문화 내지 대중운동에 대한 비판적 차원에서 제기된 파시즘 담론이다. 하지만 이는 지식사회의 ‘대중운동에 대한 공포’를 지나치게 부각시켜, 오히려 대중운동에 대한 적극적 참여와 개입을 저지할 위험이 있다.

하지만 이런 위험성들을 적절히 고려한다면, 파시즘에 관한 비판적 검토가 무용하지는 않다. 무엇보다 1930년대의 대공황에 버금가는 자본주의의 붕괴가 수년 내에 일어나리라는 예측이 더욱더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공황은 생계를 위협하는 인구 다수의 경제적 몰락을 가져온다. 여기에 어떤 방식으로도 정치적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광범위한 열패감이 결합한다면, 손쉽게 인지할 수 있는 사회적 희생양, 이를테면 유태인과 같은 대상을 구성하여 대중들의 원한을 활성화시키는 파시즘이 사회적 힘을 획득할 수 있다. 다소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파시즘은 가시적인 내부의 적을 구축하여, 이를 공동체 외부로 추방함으로써 언제부터인가 상실되었다고 상상되는 ‘어떤 공동체’를 복구하려는 정치다. 여기서 ‘어떤 공동체’는 혈통적 민족, 순수한 국가, 진정한 전통 등 다양한 모습을 띨 수 있다. 세계적인 자본주의의 위기가 이런 파시즘 정치의 비옥한 토양이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와 같은 배제가 이미 현실화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이후 국가 외부로 쫓겨나는 난민들만이 아니라, 복지체제의 해체와 더불어 국가 내부에서 실질적으로 내버려지는 인구들은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 경제가 실물 축적에서 금융 축적으로 이동함에 따라 생산관계로 포섭되어 착취조차 당하지 못하는 잉여인구들도 세계적으로 범람하고 있다. 과거에 국가와 자본이 적극적으로 포섭하려 했던 인구들은 이제 국가와 자본 모두에서 배제되는 ‘쓰레기 인간들’로 변모하여 기초 생계는 물론이고 일상적으로 극단적인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국가-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극명해지고, 내부에서 외부로 밀려나지 않으려는 경향과 외부에서 내부로 (재)진입하려는 경향은 필사적인 아귀다툼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 또한 대중들의 원한에 기초한 파시즘 정치의 풍요로운 기반으로 작용할 여지가 크다.

물론 레닌이라면, 이런 정세에서는 혁명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국가-자본을 근본적으로 변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1930년대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즘은 혁명적 상황에서 발흥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볼셰비키의 주도로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시켰다면, 이탈리아와 독일에서의 파시즘은 근본적 변혁에 대한 대중적 열망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좌절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적 패배의 산물이었다. 팩스턴은 <파시즘>에서 파시즘의 주요 요인으로 민주주의(선거제도)의 확립, 취약한 우파세력의 위기, 무능한 국가와 정치·사회 조직, 경제적 불안, 엘리트에 대한 대중적 불만, 국가·민족·공동체를 향한 대중의 ‘결집된 열정’, 대중을 열광시키는 지도자 등을 열거하는데, 이 모두가 가리키는 바는 결국 혁명이 좌절된 상황에서 변혁에 대한 대중의 열망이 파시즘으로 흘러갔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파시즘은 국가-자본에 대한 유사-혁명(따라서 반혁명)이었던 셈이다.


희망과 혁명의 기획을 위하여

따라서 현 시점에서는 파시즘의 징후들이 실존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도래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물론 그 토양과 기반은 존재하지만, 이는 우선 ‘혁명이냐 파시즘(야만)이냐’를 둘러싼 역사적 선택을 경유하게 될 가능성이 더 크다. 1980년대의 신식 파시즘, 1990년대의 미시 파시즘(‘우리 안의 파시즘’) 논의를 거쳐, 최근 학계의 파시즘 담론이 대체로 파시즘 체제의 확립을 예견하기보다는 파시즘적 경향을 진단하고 경고하는 데 집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파시즘을 저지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국가-자본에 대한 혁명이겠지만, 문제는 혁명의 길이 아직은 불확실하다는 데 있다. 따라서 앞으로 파시즘에 대한 논의는 대중들에게 실망이 아니라 희망을, 원한이 아니라 기쁨을 촉발할 수 있는 혁명에 대한 기획으로 이어져야 한다. <혁명가>에서 홉스봄은 파시즘의 주요 효과가 노동자와 농민을 신실한 파시스트로 전향시키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파시즘이 이룬 가장 분명한 효과는 ‘끝없는 회의주의’였다는 것이다.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일체의 신념이 무너지고 진보적인 이상을 향한 모든 노력이 조롱당할 때, 우리는 파시즘을 저지할 수 있는 힘을 잃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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