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구 / 자유기고가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이 ‘리얼(real)’을 표방하고 나선지 오래다. 국내 최초의 ‘리얼 버라이어티쇼’ <무한도전>을 시작으로 <1박 2일>, <패밀리가 떴다>가 이미 각 방송국의 고전적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최근에는 즉흥성과 산만함이 한층 더해진 <세바퀴>, <스타 골든벨>, <강심장> 등 ‘집단 리얼 토크쇼’가 인기를 얻고 있다. 기존 리얼리티 프로그램 시청에 익숙해진 대중은 이제 좀 더 빠른 전환과 다양한 재미를 주는 프로그램 속에서 ‘리얼리티’를 느끼고 싶어 한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즉흥성과 산만함이라는 형식적 측면 이외에도 출연 연예인들의 사생활 공개를 재미의 축으로 삼음으로써 ‘리얼리티’를 획득한다. 연예인들은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신이나 타인의 결점과 비밀을 공개하고, 일정한 출연 분량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거침없이 ‘호통’치고 ‘막말’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상대는 물론 자신의 품위도 떨어뜨려야 하는 상황이 현 예능 프로그램 출연 연예인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역설이다. 이러한 예능 프로그램의 경쟁적인 사생활 노출은 최근 방송에 복귀한 중견 개그우먼 이성미로부터 “미친 것 같다…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리얼리티 쇼, 현대적 지각과 정서를 조립한 공산품
예능 프로그램에서의 사생활 노출 경쟁은 단지 일부 방송 제작자나 연예인에 의해서 견인되지 않고 방송사, 연예인, 시청자 모두가 사로잡혀 있는 사회 구조에 의해 추동된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의 원인을 특정 주체에게 전가시키는 비판은 상황을 바꾸는 데에 별 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성미에 앞서 방송에 복귀한 중견 개그맨 최양락은 연예인들의 막말하는 행태를 꾸짖으며 손수 ‘착한’ 개그의 모범을 보였지만 아무런 호응도 얻지 못한 채 자신의 방송분이 잘려나가는 수모만 겪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비판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고자 할 때에는 먼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모든 대중문화가 결국 상품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버라이어티쇼는 코미디, 게임, 토크 등 다양한 재미의 요소들이 한꺼번에 제공되는 일종의 ‘패키지 상품’이다. 즉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사실성 추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새롭고 다양한 재미를 보여주기 위해 연예인의 사생활을 상품화한다. 그런데 상품이 추구하는 ‘새로움’의 수위란 어디까지나 대중의 보편적인 지각과 정서의 한계 내에서 결정된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얼핏 선정적인 것 같지만 실은 현 시대 소비자들의 보편적 지각과 정서 상태를 십분 반영해 가공한 공산품인 것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반영된 현대인들의 보편적 지각은 ‘즉흥성’과 ‘산만함’이다. 출연자들은 즉흥적으로 주어지는 상황에 맞춰 재주껏 재미를 만들어내고, 제작자들은 각종 자막과 웃음소리를 산발적으로 배치해 연예인들의 순발력을 평가하고 조롱한다. 이러한 감각은 본래 기계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생겨난 근대적 지각의 특징이었다. 순간순간 길을 가로막는 신호등과 미로처럼 얽혀있는 골목길 앞에서 당황하지 않기 위해 근대인들은 민첩함과 산만한 주의력을 습득하기 시작했다. 근대적 지각 능력은 21세기에 디지털 매체와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더욱 심화된다. 즉흥적이고 산만한 지각을 익힌 현대인들은 이제 컴퓨터로 문서작업을 하면서 틈틈이 동영상도 감상하고 채팅도 한다. 오늘날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이러한 현대인들의 지각 능력을 반영하여 시간과 공간의 분할을 극도로 세분화한 대중문화 상품이다.

또한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현대인들의 불안하고 각박한 정서를 반영한다. 출연자들은 고유의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 일부러 기괴하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며, 경쟁자를 이기기 위해 진행자에게 아부하는 등 온갖 술수를 쓴다. 최근 유행하는 ‘집단 리얼 토크쇼’의 경우 출연자가 캐릭터를 확보하지 못하거나 각종 상황에 민첩하게 대처하지 못하게 되면 실제로 경쟁자들 사이에서 배제되기도 한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반영되는 이러한 정서는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의 노동조건과 관계가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기본적으로 비교우위에 대한 욕망을 동력원 삼아 가동된다. 특히 극단적으로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이기적 욕심만이 아니라 한번 낙오하면 다시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절박함이 가속을 위한 연료가 된다. 남보다 앞서가고 싶을 뿐만 아니라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인들에게 경쟁은 장려된다. 예능 프로그램들이 앞 다투어 자극적인 내용을 방송하고, 연예인들이 노골적으로 사생활을 상품화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매체 환경과 노동 조건의 변화는 서로 융합하여 연예인의 사생활을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뿐 아니라 일상 영역에서도 상품화시킨다. 오늘날 연예인의 일상이 디지털 카메라에 부지불식간 포착되어 인터넷 공간을 통해 유포되는 일은 흔하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연예인은 일상 영역에서도 보이지 않는 대중의 응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 MC로 불리며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강호동이 지난 9월 <야심만만>을 통해 “연예인으로서의 (일상에서 겪는) 불편함은 출연료에 포함된다”고 발언한 사례는 연예인의 노동이 삶 전체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적 영역에서의 처세에 따라 연예인은 대중에게 인기를 얻을 수도 있고, 외면당할 수도 있다. 제아무리 신적 숭배를 받는 인기 아이돌이라 할지라도 이에 대해서는 예외가 아니다. 2PM의 리더 재범의 경우 데뷔 전에 무심코 인터넷에서 한 발언이 문제가 되어 끝내 연예 활동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사생활을 주요한 상품으로 삼는 오늘날의 연예인은 인기를 얻기 위해, 또는 생존을 위해 삶 전체를 상품화에 유용한 상태로 소외시켜야만 한다.

가상의 품으로 퇴행하는 신세기의 비평가
지난 한 세기 동안 연예인은 가히 ‘스타’로 불릴만한 신적 숭배를 받아왔다. 그러나 새로운 세기의 매체 환경 속에서 연예인은 진흙탕 싸움을 벌이며 자막과 웃음소리를 통해 조롱당하는 일개 광대로 내려앉게 되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시청자들은 빠른 속도로 전환하는 희극적 상황과 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자막을 능동적으로 조합하면서 연예인의 사생활을 유희한다. 시청행위를 통해 익힐 수 있는 예민한 지각과 능동적인 태도는 대중에게 비평가의 자질을 부여한다. 오늘날 시청자들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수동적인 감상자로 남아있지 않고 자신의 인터넷 블로그와 홈페이지를 통해 연예인과 프로그램에 대해 비평한다. 이러한 비판적 감성은 향후 정치참여의 장에서 시민의 중요한 자질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을 지닌다.

그러나 새롭게 태어난 대중 비평가들의 비평행위는 정치의 장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이내 상품 비평의 틀 속에 갇힌다. 훈련된 비평가적 지각과 감성이 자본의 무지막지한 포용 범위 안에 잠식돼버리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골적인 배금주의 풍토는 반동적으로 대중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생존능력을 인정받는 연예인을 추앙하게 만든다. 네티즌들은 어떤 급작스러운 상황에서도 재미를 만들어내고 또 누구에게도 부담없이 막말할 수 있는 연예인이 사생활에서 그만큼 사회적 능력이 있는 승리자임을 안다. 그래서 출연자들로부터 사생활 폭로의 장면을 잘 이끌어내면서도 적절한 수준으로 통제할 수 있는 진행자는 그야말로 새로운 의미에서 신적 숭배의 대상이 된다. 가장 노련한 진행자로 인정되는 유재석과 강호동에 대한 네티즌들의 찬사는 오늘날 대기업 CEO가 대중으로부터 받는 존경과 동일한 유형의 것이다.

연예인과 예능 프로그램의 상품적 가치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비평하는 오늘날의 대중은 이미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가상현실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러한 비평적 능력이 사회 구조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끝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대중이 현 시대의 매체 환경과 노동 조건을 자연 상태로 승인해버리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생존이라는 명목 하에 뻔뻔하게 자신의 물질적 성공 욕망을 정당화하고, 비평적 감각을 신자유주의 체제를 가속화시키는 데 사용한다. 이러한 대중이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통해 진정으로 ‘리얼리티’를 보기 위해서는 계몽이 아니라 양심적 결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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