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선 /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로티가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로부터 이끌어낸, 그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철학적 물음은 사적인 삶의 자율성과 공적인 자유에 관한 문제이다. 로티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란 이 두 가지 요소를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로티는 듀이를 따라서 영원불변의 진리에 관한 물음이 더 이상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윈의 진화론적 생물학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전통적인 철학적 물음이 적절한 물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완성된 채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보편적인 인간 본성이란 없으며, 그런 본성을 공유하고 있는 자아도 없다. 따라서 우리의 물음은 ‘나는 나를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로티가 말하는 ‘아이러니스트’의 과제이다.

로티의 이러한 생각은 니체의 세계관을 계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니체는 “삶과 세계는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고 말한다. 보편적인 진리, 천상의 도덕율은 이 불완전하고, 우연적이며, 덧없는 세계에 속한 나의 삶을 완성시키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그런 진리나 도덕은 이 세상에 없다. 그런 것에 집착할수록 현실의 결핍된 삶은 부정될 수밖에 없다. 삶을 긍정하는 길은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것은 초월적인 힘이 나의 운명을 지배하도록 놓아두지 않고, 내 자신이 스스로 나의 삶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것을 뜻한다. 아이러니스트의 삶은 자신의 삶을 창조해가는 예술적인 과정이다.


아이러니스트의 자아창조

로티는 헤럴드 블룸이 말하는 ‘시인의 불안’이야말로 모든 니체적인 시인이 고민해야 하는 중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블룸은 그 불안을 “스스로가 단지 하나의 복사품이거나 복제물에 불과함을 알아차리게 될 것에 대한 공포”라고 설명한다. 로티는 ‘나’를 다른 모든 ‘나’와 다르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스로가 다른 어떤 것의 복사품이 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창조적인 예술가, 창조적인 시인이라면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독특하고 새로운 작품을 통해서 자신을 창조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독특함과 새로움은 초월적인 보편성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삶의 우연성을 받아들이는 데서 가능하게 된다.     

자신의 우연성과 대면하는 과정, 즉 자신의 고유한 원인을 추적하는 과정은 새로운 언어를 창안하는 과정, 참신한 메타포를 생각해내는 과정과 동일한 것이다. 니체적인 의미에서 자율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참된 시인이 된다는 것을 뜻하며, 이것은 자신의 존재 원인에 관한 이야기를 새로운 언어로 말함으로써 그 원인을 추적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보편적 본성에 대한 철학자들의 이야기로 자신의 존재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시인이 되기를 포기하는 것, 니체 식으로 이야기하면 한 사람의 고유한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언어로 자신을 창조하지 못하는 한, 즉 독창적인 시인이 되지 못하는 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니체의 관점은 그러나 너무나도 엄격하다. 로티는 그래서 프로이트의 자아에 대한 서술을 끌어와 자아창조와 사적인 완성이라는 개념을 확장시키고자 시도한다. 로티가 생각하는 프로이트의 공헌은 우리 각자가 공통적인 인간본성의 구현물이 아니라, 개별적이며 우연적인 사건들의 결과물임을 보여줌으로써 고상한 것과 저급한 것,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 중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 간의 모든 전통적 구별을 파괴시켰다는 데 있다. 고상하지만 틀에 박힌 도덕적 인간과 문란하지만 창조적인 예술가는 제각기 다른 적응의 양태를 보여주는 것일 뿐, 우리는 어떤 인간형이 더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고 말할 수 없다. 자아창조의 과제는 보편적 기준에 우리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특이한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 스스로 과거를 재구성할 것을 목표로 한다.

프로이트식으로 보면 우리가 시인만큼 언어를 잘 다루지 못해도 자아창조의 작업에 대해 좌절할 필요는 없다. 로티는 프로이트가 우리 각자의 삶을 “제 나름의 메타포로 맵시를 뽐내려는 시도”로 바라보게 했다고 평가한다. 우리는 시를 쓰지 않아도 스스로 이미 한 편의 시인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술과 삶은 구별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각자 나름의 시를 완성해가는 과정이다. 직장동료들, 상인, 운동선수 등 소위 ‘지성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도 각자의 고유한 경험들을 통해 자신의 삶의 정체성을 구체화할 수 있다. 이들의 사적인 강박과 공상이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느냐의 여부는 순전히 시대적인 우연에 의한 것이며 보편적인 인간본성을 표현하느냐의 여부와는 관련이 없다.

그런데 로티는 삶의 우연성을 직시하고 각자의 삶을 완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왜 아이러니스트라고 부르고 있을까. 그것은 아이러니스트는 자신이 추구하는 새로운 메타포가 사실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일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독창적이고 새로운 메타포들은 선행자들의 언어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동시에 메타포를 창안함으로써 자신을 완성시키려는 시도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이러니스트는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완성되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오로지 끊임없이 다시 짜여져야 하는 욕망과 신념의 그물만이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스트는 자신의 삶이 미완성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그와 같은 사적인 완성의 노력을 중단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것은 마치 예술가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숭고함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창조의 과정을 멈추지 않는 것과 같다.


자유주의와 아이러니스트

아이러니스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지막 어휘를 추구할 수 있는 사적인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자유를 확장시키는 자유주의자의 공적인 과제는 따라서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완성을 위한 프로젝트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 된다. 전통적인 자유주의자가 보편적인 인간본성으로서의 자유, 평등, 인권 등과 같은 추상적인 가치를 실현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면, 로티의 자유주의자는 단지 구체적인 현실의 고통과 잔인성의 감소를 위해 실천하고 연대할 것을 제안할 뿐이다. 로티에게 있어서 해방되어야 할 인간본성이나 실현해야 할 본질적인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진리를 발견하고 나서 그것을 실천적으로 적용한다는 식의 생각은 낡은 표상주의적 사고를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로티는 이론을 철저히 사적인 자아창조의 영역 안에 한정시키는 한편, 자유를 확장시키기 위한 공적 실천의 영역은 이론적 진리탐구의 영역이 아니라 연대를 위한 대화와 타협의 장이라고 보고 있다. “자유를 돌보면, 진리는 스스로를 돌볼 것이다”라는 로티의 주장은 이론이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한 자유의 확대가 이론을 꽃피우게 한다는 그의 관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로티는 고통과 잔인성을 감소시키자는 자유주의자의 주장이 어떤 이론적 근거를 가지고 있기보다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로티는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완성에 대한 추구를 자유주의자의 자유의 확대를 위한 실천과 연결지을 어떤 이론적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스트는 자유주의자가 될 수도 있지만, 파시스트가 될 수도 있다. 로티는 다만 ‘자유주의자인 아이러니스트’가 바람직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로티가 모든 본질주의적, 표상주의적 사고로부터 결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지이며, 이론과 실천의 연관에 대한 전통적인 이론가들의 강박증을 떨쳐버렸다는 점에서 매우 급진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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