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영 / 수유너머 길 연구원

대학의 인문학은 현재 외출 중이다. 그것도 이중적인 의미에서 외출이다. 자본에 포획된 대학이 자본 증식에 기여하지 못하는 인문학을 대학의 변방으로 쫓아내는 ‘퇴출’이 첫 번째 외출로, 이것은 ‘인문학의 위기’를 외치는 인문학 학장단의 성명서를 통해 익히 알려졌다. 다른 하나는 삶의 새로운 희망을 전하겠다며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대학의 인문학이 자신의 가르침을 전수하기 시작한 것으로, 이는 정부나 자치단체의 지원을 받는 프로젝트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돈이 되지 않아 퇴출되던 인문학이 자신도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을 가난한 자에게 선사하는 “희망의 인문학”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내겐 좀 위험한 징후로 느껴진다. 인문학이 위기라고 절규하면서 대학의 학장단들이 요청했던 것이 국가와 정부의 지원이었다는 사실이나, 가난한 자와의 연대가 프로젝트 지원금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인문학의 활로라기보다는 계속되는 퇴출과정이라 생각된다. 돈이 없어 인문학이 위기라거나 돈이 생겨 인문학의 활성화가 가능해졌다는 생각은 모두 자본에 기대는 인문학, 결국 자본에 포획된 인문학을 만들어낼 뿐이기 때문다. 그런 점에서 대학의 인문학은 아직도 외출 중이다.
 

반시대적 인문학의 죽음

사실 대학의 인문학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데는 대학 바깥의 인문학의 역할이 컸다.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재소자를 위한 인문학, 대중들을 위한 인문학 등 현재 인문학 르네상스라고 할 만한 현상을 초래한 것은 대학에 의존하지 않았던 지식인과 활동가들의 노력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소외와 억압의 현장에서 삶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견하기 위한 과정에서 인문학과 공부가 갖는 의미에 주목한 것은 늘 대학과 자본의 외부에서였다. 전제적인 신이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무지이고 이런 무지를 바탕으로 신의 지배가 관철된다면, 삶의 조건과 권력의 배치에 대한 앎만이 새로운 삶을 창안할 수 있을 터다.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삶을 포기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 가난한 자의 비도덕성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본과 권력의 부정적 배치라는 것, 따라서 인문학은 이런 배치를 바꾸기 위한 싸움의 기술이어야 한다. 즉 인문학은 언제나 ‘반시대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인문학 르네상스에 편승해 대학의 인문학이 가난한 자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선사하고 있는 상황이 우려스러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대학과 자본의 강고한 결합에 바탕을 둔 대학의 인문학이 가난한 자들에게 달려간다고 인문학적인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오히려 그게 훨씬 더 위험한 현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포획하지 못한 소외되고 가난한 주변부 지대로까지 대학과 자본이 제국주의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현상으로 보인다. 대학의 인문학은 자본의 논리에 너무나 충실하다. 대학의 인문학은 너무나 ‘시대적’이다. 상아탑에 갇혀 있던 인문학이 ‘실천’을 위해 소외된 자의 현장으로 달려간다고 ‘시대적인 너무나 시대적인’ 대학의 인문학이 변모할 수 있으리라고 믿기지 않는다. 더 의아한 것은 이들이 실천을 꼭 소외된 자의 현장에서 지식을 전해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대학에서의 공부는 실천이 아니고 가난한 자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수하는 게 지식인의 실천이 되어야 하는가. 지식인의 연구와 공부, 이것이야말로 지식인의 최대 실천이 아니겠는가.

인문학아카데미 '길벗' 수업 현장
인문학아카데미 '길벗' 수업 현장

왜 대학에서의 인문학 공부는 무기력해진 반면 대학 바깥에서의 인문학 전수는 뿌듯한 일이 되고 말았는가. 대학 안에서만의 연구에 대한 이 모종의 죄의식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나는 이 답을 근대 학문의 존재론적 운명에서 찾는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근대 학문은 오로지 인식 행위만으로도 진리(앎)에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류에 빠뜨리는 정념과 욕망, 광기를 제어하면서 인식의 명석함과 판명함을 유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참된 것을 추구하는 선의지를 갖고 있으므로 오류를 피하는 엄밀한 방법만 따른다면 진리는 자연스레 보장된다. 그런데 진리로만 이뤄진 바보같은 사유도 있는 법이다. 선의지를 가지고 지성이 학문적인 엄밀한 방법을 따라 열심히 노동하면서 만들어낸 진리가 과연 나의 삶에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그런 진리에는 늘 필연성이 결핍되어 있다. 누구에게나 타당한 보편적인 진리가 아무리 많은 개연성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살아가는 나의 현장에 어떤 절박함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로 하여금 해석하고 탐색하고 따져가도록 몰아대는 강제, 이 강제된 사유만이 나의 필연성에 값하는 진리를 만들어줄 수 있다. 질투에 사로잡힌 남성이 있다고 해보자. 그는 연인의 거짓말 때문에 고통받는 자이고, 그로 인해 모든 평화를 박탈당한 자이다. 그는 이 고통스런 상황으로 인해 진실을 찾기 위해 고투할 것이며 그런 과정을 통해서 발견한 진리만이 그를 위로해줄 수 있는 진리일 것이다. 진리는 방법적인 절차 속에서 나오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마주친 삶의 난관이 강제한 사유 속에서 나오는 고통의 산물이다. 근대 학문에서 존재론적으로 박탈받은 운명이 바로 이 진리와 삶의 관련성이다.
 

인문학, 앎과 삶의 변증법

진리는 미리 주체에게 보장되어 있고 전제된 것이라기보다는 우연과 폭력에 노출된 사유만이 탐색하고 찾아갈 수 있는 미지의 결실이다. 진리는 주체가 자신의 존재를 삶이라는 우연적인 마주침 속에 내기를 거는 대가로만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진리를 획득하는 주체의 변신을 요청하는 법이다. 진리는 존재의 변형없이 획득될 수 없다. 반면 근대 학문은 삶과 무관한 진리, 진리와 무관한 삶을 가능하게 만든다. 진리 위에 대학과 자본, 그리고 국가를 둘 수 있게 만든 것도 바로 이 근대 학문이 가진 존재론적 분리 때문이다. 삶이 비록 자본과 국가에 포획되었다고 해도 진리는 학문적인 절차를 따르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불모의 삶이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상아탑의 이론과 현장에서의 실천이 분리된 것은 지식인들의 실천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근대 학문의 태생적 조건으로 인한 것이다. 따라서 현장으로 달려가 소외된 자들에게 대학의 인문학을 전수한다고 해서 그것이 실천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결코 이론과 실천이 봉합되지 않는다.   
 
아무리 공부해도 바뀌지 않는 삶, 삶과 아주 무관해져버린 공부, 이것이 대학 인문학의 근본적인 조건이다. 이런 조건에 대한 통찰 없이 현장에서의 실천만으로는 이론과 실천의 분리를 극복할 수 없다. 물론 대학의 지식인들에게 현장으로 달려가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문제는 그런 실천이 과연 자신의 삶을 바꾸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는 데 있다. 진리의 획득이 인식만의 특권에 한정되는 한 그런 진리는 소외된 자들에게 높은 위치에서 선사하는 계몽적인 지식 이외에는 어떤 것도 될 수 없으며 현장과의 마주침이 주는 소중한 기회들을 무위로 돌려버리는 일이 된다. 실천은 소외된 자들 앞에 설 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삶 내부에서 발생해야 한다. 그때는 현장으로 달려갈 필요없이 자기 삶 자체가 현장이 되어 있을 것이고, 이때 소외된 자와의 만남이 자신의 삶을 바꾸는 진정한 현장이 될 것이다.

인문학은 근대의 산물이다. 인간이 신의 자리를 대체했을 때, 신성가족의 비밀이 지상가족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인간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존중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자부의 순간은 이미 인간이 자신의 비루한 본성에 비판의 칼을 들이대는 순간이기도 했다. 신을 대체했다고 믿었던 인간은 과연 진정 자부심의 대상일 수 있는가. 이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은 탄생의 순간부터 이미 초극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인문학은 이미 자신의 타자성을 품고 있는 학문이다. 현재의 인간을 인류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간주하는 순간 인문학은 자신의 존립 기반을 스스로 허물게 된다. 대학과 자본과 국가에 포획된 인문학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반시대적이고 반인간적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타자성을 상실해서 위기인 것이다. 따라서 국가에 더 많은 지원을 요구한다거나 현장으로 달려가는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현재의 인간을 만들어내는 모든 조건들을 검토하면서 부정적인 권력과 가치들을 뺄셈해가는 것, 자신의 근거를 끊임없이 성찰하는 것, 바로 여기에 외출 중인 대학의 인문학이 대학 속에 다시 자리잡고 삶과 행복하게 결합할 수 있는 비결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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