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호 / 영어영문학과 교수

GNR 혁명이 온다 : ③ GNR 시대의 인간

 

 

과학기술은 언제나 우리를 앞질러간다. 그럴 때마다 우리 인문학자들은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기 일쑤다. 과연 우리는 닭이라는 잡기 힘든 과학기술을 얼마나 열심히 따라잡고 있을까. 수십 년 전 C. P. 스노우는 “두 개의 문화”를 논하면서 인문학자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무지와 과학기술자들의 인문학에 대한 무관심을 질타한 적이 있다. 요즘엔 다양한 학문들을 가로지르는 소통과 융·복합 그리고 통섭이 이구동성으로 강조되고 있지만 아직도 초보단계에 머물러있다. 하지만 어떤 과학자는 앞으로 3~40년 안에 첨단과학 기술의 3인조인 유전학(Genetics), 나노기술(Nanotechnology), 로봇학(Robotics)의 학문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통합되어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되면 미증유의 가공할 만한 새로운 문물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바로 3인조 각각의 첫 자를 딴 합성어 ‘GNR 혁명’이 그것이다. 무지한 인문학자로서는 실감나지 않는 이야기지만, 오로지 전통적인 인간주의(Humanism)에만 매달려 급격한 과학기술의 발전을 인간의 기본 가치와 위상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불평만 하고 있다면, 시대변화에 둔감하여 현실분석과 기술에도 서툴고 미래에 대한 전망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는 무비판적 인문지식인이 될 것이다.
 

‘G·N·R’이 인간에게 가져올 변화

유전학은 인간 게놈의 발견과 유전자 지도 작성 등 첨단을 걷는 학문으로 아직도 신비스런 생명현상에 대하여 커다란 도전을 하고 있다. 유전학은 인간을 위한 과학을 표방하지만 유전자 구성체계의 조작 등으로 다양한 종의 생물체를 새롭게 구성하고 복제할 수 있어 생명체들의 정체성과 주체성은 흔들리게 되었다. 인간복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만일 이런 사태가 일어난다면 생명의 존엄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탈역사적인 기술문화 속에서 인간들의 건전한 양식과 판단력은 마비되고 있고, 욕망과 자본의 무한질주 속에서 인간 사유의 비판적 기능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소위 GNR 혁명으로 인해 우리는 ‘멋진 신세계’인 테크노피아이기보다 검은 먹구름이 드리워진 환멸과 자조의 디스토피아로 향하고 있다면, 이것은 지나친 비관적 패배주의일까.

나노기술은 또 무엇인가. 일례로 미국의 21세기 나노기술 연구 개발법 제10조 2항에 따르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분자의 구성이나 특성, 기능을 갖는 소재, 소자, 시스템을 창출할 목적으로 원자, 분자 및 초분자 수준의 이해와 측정, 조작, 제조를 가능하게 만드는 과학과 기술”이다. 고도의 나노기술이 가져온, 예를 들어 초소형 정밀 가공기술, 첨단 바이오 분석기술, 나노바이오 이미징 기술 등은 우리 삶의 지형 자체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노기술과 나노융합이 긍정적인 면뿐 아니라 안전성과 윤리적인 문제 등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깊이 생각해볼 문제다.

급속히 개발되고 있는 로봇학은 현재로는 고도의 인공지능이 장착된 인간대용물을 만드는 데 초점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로봇은 결국 기계인 로봇이 생명체인 인간보다 기능 면에서 훨씬 효율적이고 나아가 초능력을 가지게 되어 주체인 인간이 도구인 로봇의 노예로 종속되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물론 오늘날 의족, 보청기, 인공관절, 전자 심박동 제어장치, 실리콘을 주입하는 성형 등은 아직도 ‘상냥한’ 인간의 도구들이다. 그러나 기계와 인간이 결합된 고도의 정보통신기술의 결과인 사이버 공간에서의 인간의 삶은 변종적 삶이 될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 탄생하게 될 인간과 기계의 잡종적인 존재인 21세기의 사이보그는 19세기의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괴물이 될 수 있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준비는

모든 문제는 ‘이미 언제나’ 인간에 관한 문제였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 인문학을 제외하고는 인간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다.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 저마다 자기 분야는 열심히 연구하고 있으나 모든 학문의 본령인 인간은 제외되기 일쑤다. 이제 우리는 인간 문제를 좀 더 종합적으로 심도있게 논의해야 한다. 특히 효율과 성과에만 급급한 과학기술문화는 인간문제를 근본적으로 경시하고 있다. 자본의 확산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 문제가 주변부로 밀려 배제되는 사태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인간을 구출해낼 것인가. 여기서 인간학의 문제가 다시 도출된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인간과 공존할 수 있는 과학문화를 수립하기 위하여 GNR 혁명과 같은 과학기술의 무서운 질주를 무조건 외면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 GNR 혁명시대와 더불어 단순한 신(新)인간학이 아닌 본격적인 쇄신의 탈(脫)인간학이 필요하다. 여기서 ‘탈’ 인간학은 인문주의적 인간학에 일부 ‘탈’을 내고 21세기의 새로운 과학의 문물상황 속에서 새로운 ‘탈’을 씌우는 지난한 작업이다. 앞으로도 GNR 혁명보다 더 급진적인 과학과 기술의 융·복합의 결과물인 변종은 계속 생겨날 것이다. 21세기 중반이 되기 전에 안정된 주체성과 고유한 정체성, 독특한 지위를 지닌 ‘인간’이란 동물은 지구에서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을 통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아젠다를 택할 것인가. 여기서 18세기 한국의 놀라운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제시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 필요해진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문명의 현 단계에서 책임있는 공적 지식인을 통해 전통적인 인문학적 인간과 과학기술적 사이버 인간이 공존하는 새로운 ‘인간학’ 담론을 창출할 수 있도록 인문학, 예술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술학이 함께 동참하는 장대한 통섭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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