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철웅 / 문화연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회 질병 보고서 : ③주민들의 안전염려증
우리 사회를 잠식하고 있는 질병은 무엇일까? 이번 기획에서는 MB정부 집권 이후 우리 사회를 잠식해오고 있는 그늘진 현안들을 질병으로 비유하여 진단하고 분석해본다. 이번 호에서는 CCTV와 같은 자기방어용 시스템이 우후죽순 늘어나는 현상을 짚어보고, 안전에 대한 강박과 실체없는 불안이 갖는 정치적 함의를 분석해본다. <편집자주>

 


 

 

“모든 곳에서 지구온난화가 가속화된다. 날마다 새로운 위협이 글로벌한 차원에서 나타났다는 경고가 뜬다. 킬러 바이러스, 킬러 웨이브, 킬러 드럭, 킬러 빙산, 킬러 미트, 킬러 백신, 킬러, 킬러, 그 밖의 우리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수많은 킬러들. 처음에는 이런 글로벌한 경고가 소름끼쳤다. 하지만 좀 지나자, 오히려 즐기게들 되었다.”

크레이그 브라운의 위와 같은 재치 있는 진단은 오늘날 위험에 대처하는 우리의 태도와 관련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인간 의식의 진보, 그리고 경제성장으로 말미암아 각종 위험에 대한 통제력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앞선 시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영속적인 불안상태에서 쉽사리 헤어나지 못하며, 안전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민감하게 반응한다. 중무장한 SUV 차량을 타고, 아파트 단지에 CCTV와 지하벙커를 설치하고, 손을 깨끗이 씻고, 이방인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위험관리

오늘날 위험의 목록들은 너무나 빠르게 업데이트 된다. 밀레니엄 버그, 9·11 테러, 쓰나미, 광우병, 사이코패스, 신종플루 등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고 간주되는 각종 위험의 목록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갱신되고 있다. 한순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위험들이 이내 새롭게 등장한 위험으로 대체된다. 오늘은 광우병, 내일은 신종플루, 모레는…. 그중 일부는 밀레니엄 버그처럼 세기말적 허풍에 불과했던 것으로 판명나기도 하나, 그게 무슨 상관이랴. 이처럼 위험이 ‘과잉생산’됨에 따라 위험은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외적인 실재의 침입이라기보다 삶의 내재적 조건인양 익숙해진다. 게다가 오늘날엔 위험의 경고에 반응하기도 전에 그것에 대한 치유법부터 재빠르게 제공된다. 인류를 절멸시킬지 모르는 신종전염병이 몰려온다, 하지만 두려워 말라, 우리가 개발한 신형 백신과 첨단 마스크만 있으면 된다, 겨우 10만 원만 지불하면!

피할 수 없는 위험에 직면해 주체가 취하는 또 다른 방편은, 위험의 존재를 받아들이되 ‘리스크’로 간주하는 것이다. 위험이 공포스러운 이유는 우리가 그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핵발전소가 폭발하고 대형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위험이 발생하는 원인과 메커니즘을 모르기에 우리는 항상 한 발 늦기 마련이다. 이때 ‘계산할 수 있는 위험’이란 의미의 리스크 개념은 위험을 분석하고 평가하고 예측함으로써 ‘통제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장점을 가진다. 리스크란 위험을 그 질적 특수성이 아니라 비용과 이익이라는 양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접근방식이다. 예컨대 개인은 주식에 얼마를 투자할 것인지, 회사를 옮길 것인지, 담배를 끊을 것인지 말 것인지 등 삶에 수반되는 각종 리스크 요인과 관련해 발생가능한 손실과 위험량을 예측해 최종판단을 내리면 된다. 물론 그런다고 실제로 더 안전해지지는 않는다. 다만 위험을 리스크로 간주함으로써 우리는 뜻밖의 결과가 발생하더라도 그것을 이미 충분히 계산했고, 잘하면 예측할 수도 있었다며 위안을 삼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오늘날 ‘리스크 관리’가 불안정하고 위험에 노출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필수 덕목인 것처럼 강조되는 데에는 나름의 사회적 맥락이 있다. 위험에 대한 대응에 있어 개인의 ‘능동성’과 ‘책임성’을 강조하는 리스크 개념과 ‘사회적 문제에 대한 개인적 해결’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국가의 통치전략에는 밀접한 친화력이 있는 것이다. 실업, 범죄, 질병 등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위험들이 결국 개인이 ‘리스크 관리’를 철저하게 하지 못한 탓으로 돌려짐에 따라, 국가는 사회적 위험을 관리해야 할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생명권력에 대항하는 정치적 주체로

위험으로부터 사회적 성격을 탈각시키고, 그것을 일회적이고 유동적인 하나의 에피소드처럼 다루는 과정에서 사회를 위협하는 모든 위험의 이미지가 교차하는 하나의 수렴지점이 발생한다. 테러리스트, 소아성욕자, 연쇄살인범, 사이코패스 등 공동체를 위협하는 내부의 적, 정치적 시민권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구분되는 사회 내부의 영원한 이방인들. 이들은 파국적인 생태적 재앙이나 과학기술의 폐해보다도 더욱 더 우리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든다. 실로 최근 곳곳에서 각종 흉악한 범죄소식들이 들려오면서 마치 사이코패스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런 공포감 앞에서 법과 정의, 인권 따위는 옳은 말하기 좋아하는 치들의 호기로 여겨진지 오래다. 지난 몇 년간 몇몇 일회적인 범죄 사건들을 계기로 공공장소 CCTV 설치, 범죄자 유전자 데이터베이스 구축, 성범죄자에 대한 전자발찌 착용 등 한때 인권에 대한 치명적 위협으로 간주되던 법안들이 아무런 논란없이 속속 도입되었다. 최근 발생한 ‘조두순 사건’과 관련해서는 아동성폭력범에 대한 ‘화학적 거세’까지 주장되고 있다. 여론은 “물리적 거세도 시원치 않을 판”이라며, 성폭력범의 인권을 따지느니 “멸종 동물의 생존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낫다”고 성화인 상태다. 그렇다면 철저한 예방을 위해 우리 모두 자발적으로 뒤통수에 칩을 박아 넣는 것은 어떨까. 또는 권력이 그러한 요구를 진지하게 실행에 옮긴다면 어떨까.

이러한 현상에는 단지 신체형(刑)과 응보주의의 시대로 역사의 시계를 되돌린다든지, 사회적 적대감을 가상의 적에게 투사하는 이데올로기적 작용이라든지 하는 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권력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푸코를 빌어 말하자면 인간의 신체뿐만 아니라 종으로서의 인류의 생명 자체를 관장하는 생명권력(bio-power)이 그것이다. 생명권력이 작동하는 곳에서 모든 정치적 대립 관계는 생물학적인 관계로 대체된다. 예컨대 나치의 인종주의는 유대인을 군사적·정치적 위협이 아니라, 아리안족의 순수성과 건강한 삶을 위협하는 나쁜 인종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그곳에는 정치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의 위협 앞에서 정치적 권리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우리가 생명의 안전과 건강한 삶을 위해 생명권력을 호출할 때, 우리는 나치의 우생학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생물학적 현실을 일정 부분 받아들이면서, 정치의 공간을 남겨두어야만 한다. 그리고 정치적·사법적 주체이자 개별적 존재로서 존중받기를 요구해야만 한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통제장치를 장착하느니 약간의 범죄를 감수하겠다고, 백신접종을 의무화하느니 독감 정도는 스스로 이겨내 보겠다고. 그리고 이것이 타인에게도 적용되는 정언명법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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