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 / 문화평론가

포획하는 사회, 탈주하는 문화 : ②루저, 루저, 루저 
세계적 불황과 경제적 양극화로 인한 절망적 분위기 속에서 ‘루저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루저문화의 향유자들은 우울한 현실을 유희함으로써 낙오자로서의 자기를 긍정한다. 루저문화는 단지 패배자들의 자기 위안일까, 아니면 사회변혁을 예고하는 효시일까. <편집자주>
 

당연시되는 단어들이 본질을 호도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곤 한다. ‘알파걸’의 경우가 그렇다. 알파걸은 여권 신장을 대변한 말로 회자되었지만, 역설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평등한 사회라면 알파걸이라는 말이 크게 회자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그런 말이 형성되는 구조다. 알파걸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들을 혹사시키는 자본주의 구조다. 자본주의 안에서 형성된 알파걸은 남성과 여성을 경쟁시키면서 우승열패의 구조를 공고히 한다.

루저담론도 위와 같은 접근이 가능하다. 소위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은 88만원 세대들의 절망적인 상황이 루저문화를 통해 유쾌한 방식으로 가시화된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대표적인 것이 ‘장기하 열풍’에 대한 환영이다. 그리고 절망적인 상황의 인식을 혼자가 아니라 함께 공유하는 모습 속에서 연대의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들은 루저들에게 자신들의 상황을 감추지 말고 당당히 선언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며, 서로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루저담론은 낭만주의와 결합된다. 예컨대, 장기하의 노래에서 묘사된 것처럼 반지하방의 축축한 이불과 쩍쩍 달라붙는 방바닥의 기운은 정작 그 안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문제의식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편안한 공간에서 살던 도련님이 가난한 집에 와서야 새삼 문제의식을 느끼고 가난을 낭만화하는 것이다. 정말 가난한 사람들만 모여 살면 가난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들은 모두 균일하기 때문에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의식이 없다.

루저문화, 승자와 패자의 이분법
 루저담론에서 흔히 거론하는 임정연의 <스끼다시 내 인생>,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같은 소설 작품들은 루저를 다뤘다기보다는 새로운 젊은이들의 일상을 다루었을 뿐이다. 루저의 ‘본좌’로 영화 <소림축구>나 <쿵푸허슬>을 만든 주성치를 들지만, 그는 주인공들의 루저정서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그들의 꿈을 다루려 했다. 또한 루저를 캐릭터화했다는 평을 받고 있는 <무한도전>의 멤버들도 루저들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평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루저담론은 처음부터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적인 구도에 붙잡혀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승자로부터 비롯한다. 패자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에 승자라는 개념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순서상 승자가 있기에 패자가 있다는 개념이 나온다. 요컨대, 처음부터 루저라는 개념은 루저들과 무관하게 승자의 논리, 자본의 논리에서 태어난 것이다. 88만원 세대의 정의처럼 적은 연봉을 받고 불안한 고용구조에서 비정규직으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루저들일까. 만약 수백억 원대의 자산에 억대의 연봉을 받는다면 이들은 승자일까. 그러한 기준이야말로 가장 자본주의적인 비교기준일 것이다.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이분법적 논리에 포획되면 루저들은 ‘물적 토대를 갖지 못해 승자들을 시기하는 존재’로 규정된다. 그리고 루저문화를 향유하는 자들은 패배감에 대한 보상심리로 자기 위안거리를 찾는 존재가 된다. 루저정서의 문화 콘텐츠는 루저라 일컬어지는 이들을 위로하면서 동시에 루저라는 존재로 현재의 상황을 합리화시켜준다. 승자·패자의 이분법적 구도부터 먼저 지적하지 않는 문화콘텐츠들은 개인을 몽환에 빠뜨리는 마약과 다름없다. 불나방스타소세지클럽처럼 ‘불고기 버거’를 읊조리고,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처럼 ‘스끼다시 내 인생’을 노래한다고 루저 문화에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기만이다. 그들은 정말 루저문화의 근본 모순을 지적하거나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자족할 뿐이다. 반지하방에서 ‘싸구려 커피’를 마시는 것이 루저의 정서라면,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연대의 목표는 승자의 도식 해체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애써 루저정서를 옹호하고, 루저들의 연대를 말하려는 것일까. 혹 흔히 부르주아와 프롤레타이아라는 이분법적 계급 개념에서 승자와 패자의 구도를 연상하기 때문은 아닐까. 부르주아는 유산자이니 승자, 프롤레타리아는 무산자이니 패자라는 구도로 연상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를 역사의 주체로 인정하는 시각에서 본다면 패자 역시 역사적 주체로 보아 루저담론을 옹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는 패자가 아니다. 둘은 서로 등치될 수 없는 개념이다.
맑스는 <헤겔의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사회적 궁핍으로 인해 기계적으로 몰락한 이들이 아니라 사회의 급격한 해체를 통해, 특히 중간계층의 해체로 인해 출현한 이들이라고 했다. 즉 신분으로 묶을 수 없는 비신분자이자 무계급자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의 대립물이거나 부르주아에 항상 대응하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또한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로부터 생성된다. 다양한 생산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부르주아의 경제활동 때문에 그 경계 밖으로 배제되며 프롤레타리아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맑스는 <공산당선언>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해체를 위해서는 부르주아의 해체가 우선이라고 했다.
이를 루저의 개념에 적용해보자. 종국에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져야 하는 것처럼 루저라는 말은 적극적으로 옹호해야 하는 말이 아니라 없어져야 하는 말이다. 또한 혁명의 궁극적 목적이 프롤레타리아의 해체이듯이 루저문화의 긍정적 측면을 말하는 담론도 루저의 해체가 목적이 되어야 하고, 루저의 해체를 위해서는 승자가 없어져야 한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루저로 지칭할 수 없고, 누구도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할 수 없다. 아무도 승자, 패자가 아니다. 단지 그들에겐 그들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이 있을 뿐이다. 승자에 대한 대립항으로서의 루저에 대한  긍정은 승자에 대한 선망을 내포하며, 루저문화를 상품화하는 이들은 승자라는 역설적 권력자의 자리에 위치한다. 우리는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매트릭스에 갇혀있다. 알파걸이라는 말 자체가 없는 세상이 평등한 세상이듯, 루저라는 역설적인 단어가 없어져야 승자의 도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루저의 정체성 자각과 연대보다 중요한 것은 꿈과 희망 그리고 행복이다. 좋은 직장과 높은 연봉은 쉽게 꿈과 행복을 대체시키며 인간을 소외시킨다. 결국 승자와 패자의 구도는 승자도 불행하게 만든다. 승자를 향해 부추겨진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연대의 주체는 꿈과 행복이 가로막힌 모든 이들이며, 연대의 목표는 승자 해체가 아니라 그 근본적인 구조의 해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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