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호 / 문화연구학과 석사과정
질문:
얼마 전 여친과 헤어졌습니다. 제 여친이 일정기간 다른 남자와 저 사이에서 고심하다가 옮겨 탄 거죠. 물론 저는 쿨하게 보내줬습니다. 나 싫다고 가는 사람을 붙잡는 것은 구질구질한 짓이라고 늘 남에게 말했고, 저 또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미치겠더군요. 저보다 잘난 것도 없는 남자에게 갔다는 것도 참을 수 없고, 그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상황을 상상하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 남자의 전 여친이 그 둘을 해코지 하는 꿈만 꿉니다. 저, 이쯤 되면 정상이 아닌 거죠?
진단:
사실 이별의 고통보다는 이런 치졸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는 게 더 괴로우신 거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건강하게 이별을 치르고 있는 중입니다. 연애란 그런 것입니다. 자신의 바닥을 경험하는 것이죠. 연애라는 건 남자는 자신이 얼마나 찌질해질 수 있는가, 여자는 얼마나 사이코 짓 혹은 바보짓을 할 수 있는가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라고들 합니다. 우아한 연애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충분히 망가지는 겁니다. 그 남자의 전 여친의 손길을 기다리지 마시고 본인이 손수 그들을 해코지하세요. 스스로 분이 풀릴 때까지 매달리고 괴롭히고 쫓아다니세요. 자기 인격의 ‘막장’을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연애의 빛나는 가치입니다. 물론 법적 한도는 지켜야 할 것이며, 못난 짓 중에서도 그녀를 두고두고 술안주로 쓰는 짓만은 삼가시길.
처방:
자신의 못난 모습에 대한 혐오감으로 ‘환멸오한증’에 떨 필요 는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찌질함에도 그만의 리듬과 미학이 있는 법이니까요. 그쪽 방면으로 이미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위인들이 꽤 됩니다. ‘아마추 어증폭기’ 밴드의 구질하고 기묘한 보컬도 그중 하나이지요. 그의 <황홀경>과 같은 곡들을 반복 재생시킨 상태에서 잠 안오는 새벽 명상에 빠져 보시길. 자신의 치졸함을 너무도 많이 배설하여 거의 탈진상태가 되었을 때, 효과는 더욱 크게 발휘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살짝 무게 실린 비트의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밴드로 옮겨 타 보세요. <한국말>이라는 곡을 추천합니다. 호소하려 하지만 호소 안 되는 처연하고 기묘한 보컬이 감정의 재고정리를 도울 것입니다. 후렴 부분인 ‘가갸거겨’는 반드시 큰소리로 따라 부르시길. 복용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자기 환멸과 나르시시즘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잔이 넘치지 않게 잘 휘저어 복용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