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감고 귀 막은, '소통' 정부

 

우리 사회를 잠식하고 있는 질병은 무엇일까? 이번 기획에서는 MB정부 집권 이후 우리 사회를 잠식해오고 있는 그늘진 현안들을 질병으로 비유하여 진단하고 분석해본다. 262호에서는 ‘소통’을 내세우는 MB정권이 그와 반대로 폐쇄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모습을 ‘자폐증’으로 진단, 그 증상의 면면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①‘소통’정부의 자폐증 ②황색사회의 녹색망상증 ③주민들의 안전염려증 ④연대상실증을 극복하라 ⑤암세포처럼 번져오는, 파시즘

 


이광석 / 중앙대 강사, 언론학

사이토 준이치 식으로 얘기하면, 우리는 ‘인간관계의 박탈’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은 고립 상태에 처해 정치 권리를 박탈당하고, 인권 유린의 사각지대에 내던져지고 있다. 정부가 나서서 소통을 내세우긴 하나, 소통의 원래 의미는 탈각된 지 오래다. 정부가 소통을 청한다 하면, 이젠 박제화되고 불통을 조장하는 대중 선전의 관변 말길을 지칭할 뿐이다. 아래로부터 나오는, 대중으로부터 뼛속 깊이 사무쳐 나오는 절규와 아픔을 보듬기는 커녕, 권력을 쥔 자들은 대중의 목소리를 매번 무시하고 침묵하고 내친다.
대한민국 정치가 아수라장이라 해도, 적어도 정치 권력은 그에 맞는 형식 민주주의 정도는 취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강제적으로 법적 구성 요건을 갖춰 원하는 것을 폭력으로 밀어부치는 현 권력의 모습은 형식 민주주의를 악용하는 후진적 권위주의의 모습이다. 적법을 가장한 권력의 추한 행위는 수많은 선량한 이들을 생채기내고 건강한 정치의 발전을 저해한다. 이렇듯 정상성과 적법성, 그리고 민주적 소통의 원래 의미를 무시하는 ‘자폐적’ 행위는 최근 도처에서 발견된다.

도처에서 드러나는 정부의 자폐적 증상들

가만 들여다보자. 재개발과 권력의 폭력으로 벌어진 용산참사가 반년을 넘겼는데도 권력자들 어느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도시 재개발의 폭력, 공권력과 정치권의 공모, 그리고 권력의 묵인이 얽혀 죽임당한 이들만 구천을 떠돈다. 권력자들의 외면은 당연히 종교인, 예술인, 활동가, 일반 시민, 빈민, 학생 등이 모여 전국을 돌면서 참극의 상황을 전하는 장정으로 풀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쌍용 자동차 농성의 강제 진압 과정도 다르지 않다. 사태의 해결보다는 폭력 진압과 검거가 남긴 선혈들이 낭자하다. 공권력의 도전에 대해 그들 식의 ‘본때’를 보여주는 것은 도를 넘어섰다. 폭력의 잣대 또한 불분명하다. 노동자들의 폭력만이 폭력으로 간주된다. 분명 많은 이들이 공권력의 폭력을 경찰봉, 방패, 군화, 전기충격 테이저건, 그리고 대규모 사법처리 등을 통해 목격했음에도 그에 대한 책임과 성실한 답은 없다. 따져보면, 상하이 자동차의 철수와 법정 관리라는 회사 상황에 대한 책임은 상당 부분 기업 운영자들에게 있었다. 그들이 비용절감을 위해 들이댔던 대규모 해고라는 구조조정 또한 일방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권력을 투입하고 과도하게 폭력으로 해결한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과거 군사독재시절 권력자들이 흔히 보여주는 위험한 불통의 정치와 다를 바 없다.
빈민, 노동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자폐적 정부의 폭력성과 함께 시민들의 목소리를 여과없이 담을 수 있는 소통의 아고라로서 광장의 역할 또한 위기에 처하기는 마찬가지다. 정치적 시위와 소통의 살아있는 광장은 분수대와 전시 공간으로 박제화됐다. 광화문 광장은 인공 조형물들로 분할되고 치장되어 ‘정원’으로 용도 변경된다. 집회는 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고, 연행 또한 선택적으로 이뤄지며 현장의 폐쇄회로 TV와 카메라를 통해 채증이 시도된다. 광장은 이름만 남고, 오로지 권력에 의한 공간 관리과 시위 대중에 대한 관리만이 남는다. 훈육의 심화요 통제의 강화다.
현실 공간의 문제는 곧 온라인 공간의 문제와 연결된다. 이 곳도 이미 단속과 불통의 감옥이 되어가고 있다. 전세계 어디에서도 주민등록번호로 실명 인증을 하는 곳은 없다. 이는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린다. 조ㆍ중ㆍ동 신문 광고주 불매운동을 영업방해로 구속하려 하는 사태는 최소한의 미국식 소비민주주의는 고사하고, 보수언론과 검찰의 공생 관계까지 의심하게 만든다. 인터넷 ‘삼진아웃제’ 등 저작권 규제를 통해 블로거나 게시판 운영자들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경우도 급증한다. 심지어 ‘유튜브’가 대한민국 인터넷 실명제를 거부하여 ‘KOREA’로 국가를 설정하면 동영상을 올릴 수 없는 한심한 정황까지 이르렀다. 9.11 테러 이후 미국에서 인권 침해 논란을 일으켰던 ‘카니보어’ 같은 아이피(IP) 서버 감시용 프로그램이 수사용으로 이용되고, 통신회사들이 속절없이 소비자 정보를 내준다는 말도 들린다. 민심을 어지럽히는 괴담을 인터넷에 퍼뜨린 이는 ‘미네르바’처럼 감옥행이다. 소통의 광장은 차벽처럼 자체 검열로 단절되어 있다.
언론의 영역도 다르지 않다. 국가 경쟁력과 미디어 산업의 국제 경쟁력 강화라는 시장 논리가 국가 대의가 되면서, 시민 대다수의 여론은 불평과 잡음으로 취급된다. 결국 여론을 무시하는 정치는 미디어법 날치기 강행 처리라는 전세계적 뉴스거리를 선사했고, 그 처리 과정조차 조악해서 ‘신문법 대리투표 의혹’에다 ‘방송법 재투표 무효 논란’까지 낳는 형국이다. 미디어 악법의 개정과 졸속 입안으로 이제 조ㆍ중ㆍ동 족벌 신문사들이 공중파 방송에 안착할 수 있는 길을 터줬다. 여당 정치인들은 굶주린 족벌언론에게 새로운 먹잇감을 던져주는 동시에, 현 정부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미디어 환경에 보수 우익의 확성기를 여기저기 심어놓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8할 이상이 연예인의 신변잡기식 잡담과 맛집 소개들이지만, 아직까지 여론 형성의 위력이 공중파 방송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권력자들은 안다. 자유 시장의 경쟁 논리를 통해, 극우 보수언론과 재벌을 미디어 영역의 지배적 주주로 키워 대중의 의식을 장악하는 법 또한 통치자는 잘 파악하고 있다.

불통의 정치, 소통의 저항

명분상 소통을 위해 존재한다고는 하나, 이렇듯 여기저기에서 보이는 현실 권력의 재현들은 자폐적 정부의 상징들이 됐다. 대중의 분노와 절규의 신호가 강하게 울려오면 당연히 수신하는 쪽은 상응하는 반응 혹은 피드백을 보내야하거늘 그 기본 룰마저 무시된다. 지난 6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 정국에서, 사회 각계에서 시국선언을 내놨으나 역시 청와대는 묵묵부답이었다. 이렇듯 교감과 소통이 불가능하고 시민들의 절규가 독백이 되는 시대에, 소통의 복원을 외치는 행위는 이제는 철없어 보이는 해법일 뿐이다. 불통, 무시, 묵인의 자폐적 정치 행위는 폭력에 억압당하는 수많은 이들의 고통을 낳고 있다. 불가능한 대상과 맺으려는 소통은 하릴없다. 오히려 불통의 정치로 고통받는, 폭발하는 분노와 저항들 간의 소통을 꾸려야 한다. 불통으로 찢기고 밟혀 소외된 분노와 저항들 각각을 엮고 잇고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 그것이 지금과 같은 비상식을 끊는 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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