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태 / 서울시립대 환경공학부

 

   순례단이 남태령을 넘어서 서울에 들어왔다는 기사를 우연히 보았다. 행렬이 지렁이처럼 기어가는 모습을 보고 든 느낌은 부끄러움이었다. 학점과 아르바이트를 핑계로, 하루하루의 고단함과 충실감에 젖어 고민하고 생각하고 부끄러워하기를 멈추었던 내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평화·생명·소통·민주주의 같은 추상적이고 막연하게 들리는, 모니터 화면 위를 흘러내리는 생각들은 전원이 꺼지면 다시 일상의 번잡함에 묻혀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실하지도 않고 와 닿지도 않는 고민은 그만 두고 몸을 움직이면서 느끼고, 느낀 것을 시작으로 고민해보자는 생각으로 비오는 명동성당으로 나갔다.
   순례는 진행 중이었다. 사람들이 지렁이처럼 몸을 낮추어 조금씩 나아가는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막상 오체투지를 시작하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았고, 주위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는 것에 스스로 약간 놀랐을 뿐이었다. 아스팔트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멀어졌다. ‘五體投地, 吾體投志’ 땅을 향해 몸을 던지고 있는, 나의 뜻은 무엇일까. 막연한 부끄러움에 여기 와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내리려는 것은 아닌가. 앞사람의 발이 보였다. 귓가에 빗길을 지나는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엎드린 몸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다시 땅이 멀어졌다. 고개를 들면 이마에서 흙탕물이 얼굴로 흘러 내렸다. 비릿한 흙탕물 냄새 때문인지 갑자기 고향의 바다가 생각났다. 모래톱 위에 푸른 갈대가 넘실거리던 고향의 바다에는 다리가 생겼다. 다리가 놓이고 매립이 되면서 사라지는 갯벌, 모래톱, 갈대, 갯지렁이, 조개, 물고기, 바닷새들이 떠올랐다.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미안한 줄도 모르고 혼자만 잘나서 눈앞에 있는 것만 보았다. 사실은 신세지고 있고 빼앗고 있는 것을 잊고 있었다. 저 사람이 나빠서 세상이 썩어서 그렇다고 분노하면서 나는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면서 남의 잘못부터 보려하고 있었다.
   진중권 씨는 진보신당 게시판에 이런 글을 남겼다. “전과 14범도 멀쩡히 대통령하고, 쿠데타로 헌정파괴하고 수천 억 검은 돈 챙긴 이들을 기념공원까지 세워주며 기려주는 이 뻔뻔한 나라에서, 목숨을 버리는 이들은 낯이 덜 두꺼운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꽃을 든 조문객을 무장한 권력이 막아서서 집에 들어가라고 방송하고, 한 사람의 죽음 앞에 막말을 내뱉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 슬픈 나라에서 오체투지 순례단의 참회와 성찰의 마음이 더욱 빛을 발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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