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20.1.2 목 12:52
기획문화
제갈명원과 사마창은의 批評計 - 비평은 살림이다⑤비평에 비평이 없다
한우리 편집위원  |  dkgkaa@cau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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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호]
승인 2009.06.03  21: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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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은 작품에 대한 사적인 글쓰기이거나 권력의 향유수단이서는 안된다. 독자와의 소통없는 비평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번 호에서는 비평의 기능과 문제점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오창은(이하 오): 최근 있었던 한 평론가와 시인 사이의 논쟁으로 시작해보죠. 시인 김선우와 평론가 김수이의 논쟁인데요. 김선우는 최근 <실천문학> 2007년 봄호를 통해 2006년 창비에 실린 김수이의 평론을 직접 비판했습니다. 김수이는 이 평론에서 최근 서정시들이 ‘자연소재의 시’로 자신의 위치를 축소시키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는데요. 서정시들이 자연 속에서 “진짜보다 행복한 가짜의 삶”을 추구한다는 비판이었죠. 이러한 비평에 대해 김선우는 “매트릭스 안이거나 밖에 시인들을 줄 세우는 비평을 기획한 것”이라고 반발했습니다. 김선우가 보기에 “비평을 위해 소모되는 시, 비판을 위한 비판과 혼동되는 비평”의 예로 김수이의 비평을 거론한 것이죠. 우리시대 비평의 문제가 시인과 비평가의 대화를 통해 그 본질이 드러난 것인데요. 시인이 비평을 문제 삼는 것은 드문 일인데, 아마도 김선우 시인이 상당히 불쾌했나 봅니다. 사실 도식적인 비평이 범람하니까 자연은유 일반을 그렇게 퇴행적으로 규정하는 비평에 문제제기를 했겠지요? 비평이 문학제도와 비평언어의 학문적 권위에 기대면서 작품을 선별하려 든다는데 문제제기를 한 것 같아요.
이명원(이하 이): 미학의 차이도 있었겠네요. 비평의 권력화 경향이랄까 이런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겠구요.
게다가 서정시를 바라보는 김수이 평론가와 김선우 시인의 태도가 확연히 달랐고요.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비평이 지나치게 문학제도 혹은 문단제도에 복속적인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명원 선생님께서 꾸준히 문제제기를 해왔죠?
저는 사실 이것은 문학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비평의 기본기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평론가들 가운데 시나 소설을 제대로 향유할 능력이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이들이 쓸데없는 이론이나 읊어대는 수준인데, 그 수준 역시 신뢰하기 힘들거든요. 그러니까 작가입장에서는 어이없는 거죠.
면밀한 텍스트 읽기는 비평의 기본이죠. 또 다른 측면에서 텍스트를 잘 읽고, 해석해내면서도 좀처럼 텍스트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찾아보기 힘든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기본기에 기반해 자기 사상을 유려하게 응축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요즘 평론가들은 변사 아니면 검사 형의 인물만 가득해요. 그러니 비평이 죽을 쑤는 거죠.
한 예로 능란한 작품 해설과 의미화에도 불구하고, 비판적 관점이 희미한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같은 경우가 있는 반면, 조영일의 <한국문학과 그 적들>은 비판의 칼날은 날카롭게 벼려져 있는데, 작품에 대한 섬세한 읽기가 약하고요.
저는 신형철씨의 문제는 비판이 없어서가 아니라, 제대로 된 해석 없이 감상을 나열하고 있다는 데 있다고 봐요. 평론이 사랑고백으로 시종하면 곤란하죠. 조영일씨는 요즘 약간의 과장된 자기도취에 빠져있는 듯해요. ‘한국문학은 끝났다’의 증명이랄까. 그래서 어쨌단 말인지...
최근 저는 문학이 누추해진 시기에 문학평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합니다.
그래요. 사실 요즘 문학평론을 읽는 사람은 없죠.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제대로 된 에세이 정신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가령 루쉰 식의 글쓰기랄까.
비평이 제대로 된 에세이가 된다는 것은 참 힘든 것 같아요. 어떤 의미에서 젊은 비평가인 신형철이나 허윤진이 그런 시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사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건 에세이가 아니라 일기지요. 에세이란 사상의 순금부분을 발휘할 수 있는 중후한 글쓰기입니다. 수필 나부랭이가 아니라. 그래서 저는 데리다도 에세이스트라고 생각하죠.
비평적 에세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비평가가 공적 영역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비평행위를 사적으로 전유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는, 우리 문학에 공통의 공적 공간이 부재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실제로 현장 활동을 하는 비평가는 대부분 매체에 얽매여 있지 않아요. 비평가가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횡단적 사유를 해내면서도, 대중이나 공적 영역에서 의미를 생산하기란 쉽지 않아요. 이런 식이죠. 창비 비평가, 문지 비평가, 문학동네 비평가 등 출판시장에 도급된 하청업자 같은 양상이에요.
비평가가 자기 활동의 장을 문학장에 둘 것이냐, 아니면 보편적인 사회적 의제를 생산하는 데 둘 것이냐를 선택해야 합니다. 문학장 안에서 제도적으로 기능하는 비평가는 사실 담론기술자에 불과해요. 문학거간꾼이거나. 사실 그게 한국문학을 이렇게 처연하게 만든 원인입니다.
갑자기 사르트르가 한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그는 “작가와 지식인, 그리고 비평가는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존재”라고 했어요. 작가, 지식인, 비평가는 “세계의 불안정성 때문이 아니라 불안한 시선을 통해 세계를 인식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죠. 이러한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의미있는 사회적 의제를 생산해내고 발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비평가가 출판제도나 학문제도, 혹은 대학제도 내에서 안정적 글쓰기를 지향할 때, 그들의 언어는 권위적인 형태로 변질되는 것 같아요. 아니면 대단히 사적 형태로 발화 되거나요.
아마 꼰대의식이란 게 문학장에도 있겠죠. 그러나 대중을 향해서 개방되는 글쓰기가 아니라면, 그것을 비평이라 말하기 어려워집니다. 대중 속에서 온몸으로 위기를 살아내는 글쓰기가 비평이죠. 저는 제가 한 번도 문학비평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냥 비평가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지식인적 정체성을 갖고자 할 때, 그 비평가는 꼭 문학장 내에서만 머물지는 않겠지요. 이명원 선생님처럼요.
이제는 지식인의 특권성도 사라졌다고 봐야죠. 물론 지식인의 책임은 존재하지만. 중요한 것은 문학의 안과 밖을 다 봐야 한다는 거겠죠. 애초에 문학비평이란 게 보편적 인문담론 아닙니까.
저는 아직까지는 ‘문학’이라는 구체적 텍스트를 부여잡고, 그에 기반해 비평을 전개하려는 입장입니다. 문학평론가로서 자신을 규정하되, 문학에만 갇히지 않겠다는 의식적인 노력을 하는 편이죠.
그게 저하고 다른 점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의미있는 작업인 건 분명하죠. 작업가설은 다 다른 것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문학비평, 혹은 비평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볼 필요가 있겠네요.
이 시대에는 문학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습니다. 그래도 문학이 필요하다면, 그게 뭘까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죠. 저는 문학 역시 커뮤니케이션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문제는 문학장의 커뮤니케이션 회로가 폐쇄적이 되고 있다는 거예요. 마치 무슨 비밀결사 같죠. 이것을 개방적으로 변혁해야 합니다.
그래요. 원론적으로는 비평의 기능이 “선택과 판단에 의해 평가하고, 반드시 그 평가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대화와 소통이 전제되어 있음은 자명하다고 봐요. 비평가는 텍스트 혹은 비평의 대상에 매혹이나 비판만으로 비평행위를 지속할 수 없고, 평가를 통한 권력의 은밀한 향유만으로도 자신의 글쓰기를 위안할 수 없는 것처럼요. 대중 혹은 독자와의 대화와 소통을 통해 비평의 수고로움을 보상 받을 수 있다고 보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독자들이나 대중이 비평가에 대해 ‘자신의 종족의 언어로 방언을 내뱉는 이들’로 경원시하고 있는 현실을 냉철히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요는 비평가들이 과연 대중을 의식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문단의 동료만을 대화상대자로 삼고 있는지 하는 거예요.
저는 ‘비평은 살림이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네요. 사람살이를 고양시키고, 대중과의 소통을 통해 문학을 북돋워 살리기도 하고, 때로는 좋은 삶과 저해되는 요소와 싸우기도 하는 살림의 비평 말입니다. 저는 위의 말로 마무리를 대신 할께요.
좋은 비평은 공감의 커뮤니케이션을 발생시키는 게 아닐까요. 문학을 경유해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고 말이죠. 최선의 삶을 위한 최상의 작품에 대한 혜안이 중요한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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