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하 / 성균관대 학부대학 교수


 
폭력은 모두 악인가. 모든 폭력은 비난받아야 하는가. 폭력의 20세기를 지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도처에 만연한 폭력을 목격하고 있다. 이번 기획에서는 다양한 폭력담론을 비교·분석해 봄으로써 폭력의 본질과 영향, 그 메커니즘을 고찰해보고 그것의 정당성과 한계, 대안에 대해 고민해본다. <편집자주>
 

    “미친놈이 차를 몰면서 길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치어 죽이고 있다고 하자. 목사인 나는 그 사람 뒤만 따라 다니며 희생당한 사람들의 장례를 치러주면서 그들의 영혼이 천국가기를 기도해주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미친놈을 직접 차에서 끌어내려야 할 것인가?”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당한 독일의 현대 신학자 본훼퍼가 옥중에서 썼던 글 중에 자신의 고민을 잘 드러낸 구절이다. 여기서 미친놈을 직접 차에서 끌어 내리려고 했던 본훼퍼의 입장은 폭력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일종의 대항폭력론의 입장이다. 폭력에 대한 논의에서 이러한 대항폭력론은 비폭력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제기된다. 비폭력주의의 입장을 취한다면 미친놈이 계속 사람을 치어죽이도록 방관해야 하고 그것은 사실상 살인을 방조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폭력은 그 과정 자체에서 고통과 무질서를 동반하기 때문에 비폭력주의가 일반적 다수의 동의를 얻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같은 비폭력을 주장하는 입장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비폭력을 도덕적 규범으로 주장하는 ‘규범적 비폭력주의’인지, 아니면 현실적으로 권장해야 할 정책으로 판단하는 ‘정책적 비폭력주의’인지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자는 모두 비폭력주의가 불의를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단지 불의를 부정하는 방식이 폭력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뿐이다. 그러나 위의 두 입장은 비폭력 자체에 대한 가치 부여에서 차이를 보인다.

불의를 방조하는 규범적 비폭력주의


   규범적 비폭력주의는 비폭력이 본래적 가치를 가진다고 보아 비폭력을 절대적 도덕규범으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비폭력을 택한 결과, 악이 강해지고 많은 희생이 초래된다 하더라도 비폭력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규범적 비폭력주의는 대체로 내면적인 요소를 중요시한다. 폭력으로는 폭력의 근원을 치유할 수 없다. 폭력의 근원은 내면 속에 존재하는 불화나 증오이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고 마음의 평정을 찾으면 폭력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다소 희생이 따르더라도 끊임없는 설득과 교화를 통해 폭력적 성향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입장에서 보자면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대항폭력을 쓸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거짓이고 변명일 따름이다. 인간은 절대적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폭력 사용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은 자유의지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규범적 비폭력주의는 현실에서 많은 문제를 초래한다. 우선 비폭력을 종종 무저항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데, 이렇게 되면 비폭력은 불의에 저항하는 한 가지 방식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불의를 인정하고 온존시키는 방조의 수단이 된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자유를 절대화시키는 환상을 전제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규범적 비폭력주의에 대해 대항폭력론은 문제를 제기한다. 대항폭력론은 폭력을 미화하고자 하는 입장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의 불가피성을 강조한다. 사회계약론자중 일부는 권력이 신민을 보호하겠다는 계약을 위반했을 때 폭력을 써서라도 주권을 되찾아 와야 한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도 폭력을 역사 발전을 위한 불가피한 과정으로 인식한다. 폭력자체는 중립적인 수단이며 궁극적으로는 없어져야 할 대상임을 인정하지만 당장 현실에 존재하는 억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폭력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자인 포퍼도 대항폭력을 인정한다. 자유주의는 관용의 원칙을 중요시한다. 문제는 관용을 해치는 사람에게까지 관용을 베풀 것인가 하는 것이다. 관용의 사회를 파괴하려는 사람, 민주주의를 전복하려는 사람에게까지 관용을 베푸는 것은 관용과 민주주의 자체의 파괴를 용인하는 자기모순적 태도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본다. 파농은 대항폭력의 치유효과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오랜 억압으로 지배이데올로기가 내면화되어 있는 사람은 지배에 저항하는 폭력적 실천을 통해 왜곡된 의식을 더 효과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항폭력이 정당하다고 본다.
결국 대항폭력론은 폭력을 두 가지 측면에서 정당화한다. 우선 동기의 측면에서 대항폭력은 억압하려는 폭력이 아니라 해방하려는 폭력이다. 불의를 단죄하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폭력이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 결과의 측면에서도 대항폭력은 비폭력보다 희생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정당하다.

저항수단으로서 정책적 비폭력주의
 

   현실적으로 대항폭력이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더 강한 폭력적 억압의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고, 더 큰 폭력을 유발하여 저항 자체를 말살시킬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폭력을 현실적으로 현명한 선택으로 여기는 정책적 비폭력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정책적 비폭력주의는 비폭력을 절대적 도덕규범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장기적으로 볼 때, 그리고 다수의 경우에 비폭력이 문제를 해결하는 효율적인 정책이기 때문에 비폭력을 택하는 것이다. 이는 비폭력을 수단으로만 보는 것이다. 이 경우 비폭력은 저항의 결여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저항 수단이며, 적극적 수행을 동반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대항폭력론자와 정책적 비폭력주의자는 실제로는 규범이나 원칙이 아닌 현실인식에서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과연 지금이 폭력적 저항을 해야 할 상황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대항폭력론자는 참을성이 부족한 반면, 정책적 비폭력주의자는 더 인내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책적 비폭력주의자는 예외적인 경우 폭력이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하지만, 대항폭력론자는 폭력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정당한 것으로 판단한다. 
   정책적 비폭력주의를 주장한 예로, 폭력을 권력과 대비시켰던 한나 아렌트를 들 수 있다. 아렌트는 폭력을 문제해결의 길로 생각하는 진보적 모델들을 강하게 비판한다. 60년대 신좌파운동의 과격성, 그리고 파농과 사르트르, 소렐의 폭력론을 검토하면서 이들을 모두 비판한다. 특히 아렌트는 사르트르의 폭력예찬을 비판하면서 마르크스와 20세기 혁명가들의 차별성을 부각시킨다. 신좌파 학생운동의 폭력예찬은 파농이나 사르트르에 의해 고취된 것이지 마르크스의 생각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폭력을 산고(産苦)에 비유했다. 폭력의 역사적 역할을 인정하긴 했지만, 부차적인 것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낡은 사회에 내재한 모순이 그 사회의 종말을 불러오는 실제 원인이다. 폭력이 새로운 사회의 출현에 동반되는 경우는 많지만 원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마치 산고가 생명체의 탄생에 동반되기는 하지만 원인은 아니듯이.
   아렌트가 폭력을 무조건 비합리적인 것으로 본 것은 아니다. 인간이 비인간화되는 특정 상황에서는 폭력이 정의의 척도를 다시 세우는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부당한 적의 얼굴에서 위선의 가면을 벗겨내는 폭로적 폭력은 합리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폭력은 이처럼 단기적 목표를 추구할 경우에만 합리적일 수 있다는 것이 아렌트의 주장이다. 폭력은 불만과 분노를 극적으로 표현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고, 이를 통해 공적인 주의를 환기시킬 수도 있다. 그래서 아렌트가 보기에 사실상 폭력은 혁명보다는 개혁을 위한 무기이다. 그러나 단기적인 목표를 향해 이루어지는 폭력도 수단이 목적을 압도하는 결과를 낳기 쉽기 때문에 결코 장려할 대상은 아니다. 결국 아렌트는 비폭력을 기본 정책으로 삼는 것이 현명하지만, 극히 예외적이고 단기적인 처방으로, 폭력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 정책적 비폭력주의의 모습을 보인다.
   우리 현실에서도 정책적 비폭력주의의 관점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섣부른 대항폭력론은 폭력의 남용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고, 규범적 비폭력주의는 부당한 권력에 의해 이용될 우매함에 빠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현명한 정책적 비폭력주의가 거리를 배회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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