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올바름’인가,

 

  Q.   김형주 / 철학과 석사과정

 정치철학은 철학인가, 정치학인가? 플라톤의 <국가>편은 이 문제에 접근하기에 매우 좋은 모델이라고 생각된다. <국가>편에는 수많은 정치학적 논의, 정치모델들의 원형이 심심치 않게 언급되기 때문이다.
<국가>편의 궁극적인 주제는 ‘올바름’이다. ‘올바름’은 전통적인 철학적·윤리학적 주제임과 동시에, 정치학의 핵심적인 주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자체’의 올바름에 관한 문제인가, 아니면 ‘국가’ 혹은 ‘정체(政體)’의 올바름인가? 플라톤은 ‘올바름’ 자체를 <국가>편 전체 논의의 핵심적-포괄적 주제로 던지면서 인간 자체의 유덕함을 주제로 삼는다. 그러나 이를 설명하는 플라톤의 전략은 우리를 다시 한 번 미궁으로 이끈다. 인간 자체의 ‘유덕함’, ‘올바름’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플라톤은 개체적 인간을 국가 전체에 비유한다. 그리고 논의의 세부 내용과 단계적 주제들은 이제 인간 자체에 대한 윤리학적 논의의 차원에서 국가 전체의 정치학적 차원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다시 플라톤은 ‘올바름’ 자체에 대한 논의로 돌아와서, 인간의 영혼에 대한 신화적 설명으로 논의를 끝맺는다. 


 우리는 이미 근대라는 긴 요술터널을 통과했다. 그 결과 우리의 지성은 새로운 습관을 얻었다. 우리의 쪼개진 지성은 무엇이든 분석하고 범주화하려 한다. 그 탓에 우리는 ‘하나’자체로 놓여진 텍스트를 그 자체 의미로서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것이 아닌지, 우리의 알 수 없는 강박증에 정작 플라톤 자신은 소외당하고 있지 않은지, 다시 한 번 묻는다. 그 끝에서 플라톤과 우리 자신, 분화된 학문들 사이에 숨죽이고 있는 소통의 실마리가 발견된다.

 

 A.   최선규 / 정치외교학과 석사과정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물론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이 질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고대 그리스인들과 사뭇 다르다. 근대라는 획기적인 시기를 지나온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즉, 삶의 가치와 목적, 방식에 대한 질문의 최종적인 심사를 ‘개인’이라는 존재에 맡겨버렸다. 특히 전체주의의 아픔을 겪은 후 개인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 지에 대한 어떠한 간섭이나 논의도 더 이상 순수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국가>의 주제는 올바름이다. <국가>편의 논의의 흐름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올바름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하여 국가와의 유추를 거쳐 다시 개인의 올바름으로 돌아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에서의 초점은 분명 개인의 올바름에 맞추어져 있다. 하지만 개인의 올바름은 정치공동체와 절연된 상태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올바름은 타인과의 관계를 전제하며 이는 곧 정치공동체로 관심의 초점을 옮길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문제는 존재의 본질적인 물음인, ‘존재의 이유’에 관한 것이다. 근대라는 획기적인 기획 이후 학문의 영역은 계속해서 분절되고, 개인은 정치공동체를 포함한 사회 일반의 공동체, 그리고 자연 일반과 분리되었다. 이러한 분절의 결과는 개인의 훌륭함을 다루는 윤리의 영역과 정치공동체의 문제를 다루는 정치의 영역, 본질적인 지식의 문제를 다루는 철학의 영역, 사회의 운영원리인 법의 영역, 재화의 유통과 분배의 문제를 다루는 경제 혹은 시장의 영역 등의 구분으로 나타났다. 인간의 존재 이유를 밝히는 문제는 특정 영역과 관련이 있는 분과적 지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근대의 기획은 이를 종용 혹은 묵과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포함한 인식 가능한 대상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 즉 각 분과의 단편적 지식들을 종합하려는 시도와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삶의 방식과 목적, 가치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을 정치공동체의 주된 담론으로 구성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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