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인 /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

경기회복을 위한 최우선 과제는 국민의 신뢰회복

 

주지하듯이 우리나라는 지난 해 하반기 이후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에 의해 촉발된 제2의 외환위기를 경험했다. 환율이 치솟고, 주가는 하락하고, 경기는 가라앉았다. 20여 년 동안의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사회초년생들은 자립의 기쁨보다는 실업의 차가운 겨울을 맞이해야 했다.

 

대책없는 대책으로 일관한 정부


이러한 제2의 외환위기에 대한 정부의 초기 대응은 우왕좌왕과 미봉책, 그리고 맹목적인 경기부양이었다. 우선 우왕좌왕의 사례부터 살펴보자. 원화절하는 작년 3월부터 올해 3월까지 약 1년 동안 몇 차례의 단계를 거쳐 나타났다. “몇월 위기설”의 첫 화살은 작년 3월이었다. 외부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외화자금 시장은 작년 3월에 상당히 심각한 홍역을 치렀다. 만기연장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이때 이미 단기 외화부채에 허덕이던 금융기관들은 만기연장이 제대로 되지 않아 1년도 안 되는 초단기 연장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그러고 나서 불거진 것이 9월 위기설이었다. 외채의 만기구조는 이미 리만의 파산이 아니더라도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시장은 일찍부터 반응했다. 6월이 지나면서 원화는 완연한 절하국면으로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이 때 정부의 대응은 ‘환율사수’였다. 작년 7월 박병원 청와대 경제수석과 강만수 지식경제부 장관, 그리고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3자 회동을 갖고 외환보유액을 사용해서라도 환율을 지키겠노라고 대내외에 천명했다. 그리고 외환보유액을 지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호언장담은 불과 2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8월 하순에 오면서 한은이 먼저 발을 빼기 시작했다. 그리고 9월 들어 리만사태가 오자 정부는 사실상 환율안정을 포기하고 말았다. 정책이 우왕좌왕한 대표적 사례다.


미봉책의 예는 부도유예를 들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위 ‘대주단 협약’이다.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매우 선진화된 기업회생제도를 가지고 있다. 외환위기 10년을 거치면서 사법분야에서 가장 괄목상대로 발전한 두 분야를 들라면 하나가 도산제도의 현대화이고 다른 하나가 기업지배구조의 개선이다. 법률도 현대화 되었고 파산부 판사들도 유능하다. 그런데 정부는 법원이 기업의 목줄을 잡는 것을 마땅치 않아 한다. 그래서 미국의 GM이 파산보호를 신청하는 오늘날에도 우리나라는 기업이 통합도산법상의 기업회생 절차를 신청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법원 밖에서 관료가 주도하는 유사 도산절차를 하나 더 만들었다. 그것이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이다. 정부는 법률적 근거 없이 우겼던 부도유예 협약과 같은 과거의 도산유예제도를 기업구조조정촉진법으로 통합했다. 그렇다면 대주단 협약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의 입장에서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업, 즉 파산되어야 마땅한 기업을 연명시켜주는 제도이다. 무조건 살리고 보자는 것이다. 미봉책이 아닐 수 없다. 


미봉책의 또 다른 예는 대졸취업자의 초임 삭감이다. 이 돈을 깎으면 그 재원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할 수 있다는 것이 그 대의명분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대졸 초임이 얼마나 한다고 이것을 깎는단 말인가. 또 그런다고 실제로 고용은 얼마나 늘어나고 기업에 대한 근로자의 충성도는 얼마나 높아질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미봉책이 아니면 그 무엇이 미봉책이 될 수 있겠는가.


초기대응의 마지막은 맹목적인 경기부양이었다. 이것은 앞에서 예로 든 미봉책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가 백척간두에 선 미국의 중앙은행이 모든 선례를 깨면서 넣을 곳, 넣지 말아야 할 곳을 가리지 않고 돈을 퍼붓는 것이야 그렇다 치자. 그런데 우리나라의 한국은행 역시 비은행 금융기관에 마구 본원통화를 퍼부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위기극복을 위한 단기적 유동성 공급이라고 봐 줄 수 있다. 문제는 정부였다. 사업타당성이 의심된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대규모 토목 건설사업을 밀어 붙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세를 추진했다. 그것도 모자라 올 봄에는 사상 최대 규모의 추경을 발표했다. 이것이 맹목적인 경기부양이 아니고 무엇이랴.

 

구조개혁과 신뢰회복이 관건


맹목적인 경기부양의 효과는 일부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가는 오르고 있고 부동산도 들썩이고 있다. 이것이 경제의 회복에 따른 자연스러운 반등일지, 과잉 유동성의 범람에 따른 투기의 초보적 모습일지는 조금 더 두고 보아야 하겠다. 그러나 자산가격의 반등만으로 위기가 다 지나갔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맹목적인 경기부양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 반대는 목표를 가진 구조개혁이다. 물론 정부는 구조조정을 한다면서 부실채권정리기금도 만들고 금융안정기금도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강조점을 잘못 잡은 것이다. 지금 시급한 것은 가계 및 중소기업의 부실 정리이다. 우리가 이번에 직면한 구조조정이 지난 외환위기 때와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점은 그때는 몇몇 대기업의 위기가 현저했지만 지금은 모래알처럼 수없이 널려 있는 가계대출의 부실이 문제라는 점이다. 그 때가 소나기라면 지금은 가랑비인 것이다. 그러나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 이 구조조정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다.


문제는 가계대출에 대한 구조조정은 정부의 한 정책팀이 나서서 칼자루를 쥐고 시원하게 해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렇게 하기에는 하나하나가 너무 작고 또 전체적으로는 너무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스템이 처리할 문제다.


그것을 위한 가장 시급한 과제는 개인회생절차를 정비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기업회생절차가 담보채권자의 채권회수를 정지시키는 것과는 달리 개인회생절차는 이런 특징이 없다. 따라서 어떤 개인 채무자가 담보로 잡힌 자기 집을 지키려고 개인회생절차를 신청해도 집을 지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개인채무자는 집을 지키기 위해 악성 채무를 부담하거나, 집을 포기하고 개인파산을 신청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악성채무를 부담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고, 경제활동을 해야 할 채무자를 파산자로 만들어 일정 기간 그 활동 기회를 사실상 박탈하는 것도 경제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빨리 통합도산법의 개인회생 절차를 정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구조개혁이다.  물론 구조개혁 과제가 단순히 개인도산 절차를 정비하는 것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또 하나 현저하게 남아 있는 과제는 6월에 뜨거운 감자로 부상할 비정규직 근로자 문제의 해결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에는 지면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다만 이것이 중요한 문제라는 점만을 지적하기로 한다.


위기극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과제는 정책당국자의 신뢰회복이다. 외환보유액을 헐어서라도 환율을 지키겠노라고 기자들 앞에서 사진 찍고 나중에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시장에는 투기꾼들만이 넘칠 뿐이다. 이런 문제는 올해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4월에 기획재정부와 금융위, 금감원은 한 목소리로 과잉 유동성의 문제를 지적하며 한은을 공격했다. 그러다가 금리인상에 대한 우려가 고개를 들자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올해 금리인상은 없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부동산 관련 세제를 완화하면서 부동산 투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겠다는 말도 있었다.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위기극복은 거의 언제나 국민의 희생을 수반한다. 국민은 양떼와 같아서 자신이 믿는 목자의 소리에는 전적으로 순종하지만 믿지 못하는 목자의 말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정책당국자의 신뢰회복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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