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촛불시위가 시작된 지 1년이 지난 현재, 한국사회는 다시 변화의 기로에 서있다. 이명박 정부의 신공안정권과 신자유주의정책은 서민을 옥죄는 것도 모자라 민주주의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녹색평론>의 김종철 발행인이 짚어내는 현 정권의 문제점과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살펴본다. <편집자 주>


민주주의는 이념보다 생존의 문제다

 

작년의 촛불시위는 정말 장관이었다. 그것은 결국 우리사회에 잠재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엄청나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국가와 자본은 심히 불안을 느껴 온갖 가능한 방식으로 이것을 억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1년이 경과한 지금 되돌아볼 때도 여전히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무엇보다 촛불에 의해 정당성이 부정된 국가권력은 불과 몇 달 전에 어떻든 민주적 절차로 뽑힌 정권이었다. 사실 이명박과 이 나라의 보수권력은 그 몇 달 동안에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그들이 원래 도덕적 정당성이 없는 정치세력이라는 것은 선거 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걸 알면서 정권을 맡겨놓고는 몇 달 후에 와서, 쇠고기 협상의 잘못을 이유로 그 정권에 대해 극도의 실망과 분노를 표현했던 것이다.


물론, 쇠고기 수입문제에서 그들은 평범한 시민들의 생명과 건강권을 지켜주어야 할 국가의 의무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것은 개탄할 만한 일이지만 따져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쇠고기 협상 처리방식은 정권의 반민중적, 친재벌적, 친미 일변도 성향으로 볼 때 충분히 예견된 사태였다.
그러니까 왜 촛불시위가 시작되었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을 겪은 것은 국가권력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 자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왜 이러나 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촛불이 한창일 때 대통령이 두 번이나 사과 아닌 사과를 한 것은 공포를 느낀 탓이지, 촛불의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기회가 오자 전방위적인 탄압에 나서며, 표현과 집회의 자유를 포함한 민주적 기본권을 부정하고 사실상 경찰국가체제의 수립에 열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명박 정권은 고립을 자초하고, 갈수록 포악해지면서 자신의 묘혈을 파는 어리석음에 깊숙이 빠져 들었다. 이 어리석음의 필연적인 귀결이 ‘용산참사’이며, 그리고 ‘노무현의 죽음’이다.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 위축시켜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충격적인 사태에 지금 온 나라가 들끓고 있지만, 이 비극적인 사태는 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는 데 적지 않은 공헌을 한 것이 다름 아닌 노무현 정권이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그의 민중 지향적인 정치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경제문제에 있어서는 무슨 이유인지 철저한 반민중적인 노선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고집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상반되는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에 기여했다. 그는 국토의 균형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전국에 걸친 토지투기와 부동산 거품을 조장하고, 또한 느닷없이 한미FTA를 추진함으로써 사회적 약자들의 생활기반, 특히 농촌공동체의 자립적 생활기반을 무너뜨려온 역대 정권의 정책에 사실상 동조했다. 그리고 이라크 파병이나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둘러싼 진보진영과의 갈등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지지기반 자체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서 크게 실망한 대중들은 민주, 진보세력에 대한 깊은 불신과 환멸을 느꼈고, 그 결과가 이명박 정권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섬으로써 그동안 우리의 민주주의라는 게 얼마나 뿌리가 약한 것인지가 금방 드러나 버렸다. 그나마 민주화 투쟁의 산물로 집권한 정부 아래에서는 민주적 기본권과 인권이 어느 정도 존중될 수 있었지만, 그 정부들에서 일관되게 추진해온 신자유주의 정책은 경제-사회적 불평등을 갈수록 심화시킴으로써 사실상 민주주의의 토대 자체를 파괴해왔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란 실질적인 경제-사회적 평등, 즉 경제민주주의가 구현되지 않는 한, 단지 명목뿐인 민주정이 실제로는 소수 특권층에 의한 과두정이 되기 쉬운 것이다.


실제로 이명박 정권의 경제정책은 이전의 민주정부들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핵심내용인 민영화, 규제완화, 감세, 자유무역, 세계화 등은 민주정부 시절에도 일관되게 추진된 정책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이 정권에 의해 훨씬 더 노골적으로 강도 높게 추진되는 것은 이 정권이 민주주의를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자본주의가 그렇지만, 특히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신념체계이다. 실제로 초기 자유주의 사상가, 예컨대 아담 스미스가 생각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소규모 독립 생산자들에 기반을 둔 경제구조였지, 거대 독점자본이 지배하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따라서 오늘날 다국적 기업과 글로벌 금융자본의 압도적인 통제 하에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반민주적, 반민중적 성격을 비판하기 위해 우리가 꼭 사회주의 이론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체제가 민주주의의 적이라는 것은 전통적인 자유주의 사상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지적될 수 있다. 실제로 20세기 초 영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자유주의 사상가였던 힐레어 벨록은 영국을 포함한 당시의 산업 선진국들을 사실상 ‘노예국가’라고 규정했는데, 이런 비판은 그의 자유주의적 신념에 근거한 것이었다.


하여튼 신자유주의 통치 하에서는 민주주의가 현저히 위축될 수밖에 없다. 흔히 신자유주의자들은 국가개입을 부정하고 시장의 자율성을 강조함으로써 마치 자유의 영역이 넓어지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실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강제노동에 종사함으로써만 연명할 수밖에 없는 사실상의 임금 노예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들의 ‘자유’론이 결국 자본가, 부유층들에게 국한된 자유임이 확실하다.


뿐만 아니라 시장의 자율성이라고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국가 없이는 실제로 자본주의든, 신자유주의든 전혀 작동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가령, 금융위기로 파산 직전에 내몰린 기업에 대한 긴급 구제금융은 특별히 예외적인 사태가 아니다.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국가에 의한 기업 보조금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늘 있어왔고,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국가개입 반대론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복지와 사회적 서비스를 반대하는 것이지, 자본과 기업에 대한 지원을 반대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더욱이 신자유주의 정책이 확대되면 사회적 갈등과 불안이 증가하게 마련이며, 이 때문에 국가 공권력과 법률에 의한 사회통제가 필요하게 되는 법이다. 그리하여 명목상으로는 민주사회라면서도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한, 국가는 사실상 경찰국가로 전락하고 만다. ‘합법적인’ 국가폭력 없이는 체제 유지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와 자연을 보호해야


그러나 2008년 가을부터 본격화된 금융위기로 전세계가 동시불황에 빠져버린 위기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체제로 계속 가다가는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인간사회와 지구환경이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공유되면서 지금 인류사회는 새로운 출구를 찾아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에 직면해있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예외적으로 이러한 세계의 흐름을 외면하고 있다. 이 시대착오적인 행태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체질적으로 사회적 약자들과 자연과 더불어 공생하는 삶을 상상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탓인지 모른다. 어쨌든 이 정부는 지금 국내외의 양심적이고 독립적인 조언에는 귀를 닫은 채, 이미 선진 산업국들에서 실패한 것으로 명확히 드러난 정책, 즉 부유층 감세, 의료 및 교육의 영리화, 민영화, 규제철폐 및 자유무역의 분별없는 확장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노선이 고수되는 한, 사회적 약자들과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 된다. 그러나 지금 국가와 자본은 모든 비판세력을 억압하기로 결심했고, 그 결심은 아직 흔들림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이 나라는 20년 전 피나는 투쟁을 통해 쟁취한 민주주의가 물거품처럼 사라지려는 위기에 처해버렸다.


민주주의는 지식인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이념이 아니라, 풀뿌리 민중의 삶이 걸린 사활의 문제이며, 이 땅에서 살고 있거나 앞으로 살아갈 뭇 생명의 생존을 위한 자연적 토대를 보존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벼랑 끝에 선 민주주의를 구하는 것보다 더 긴급한 과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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