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20.2.28 금 17:55
특집
특집서평구양봉 / 도서평론가
백소진 편집위원  |  kqor007@cau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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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호]
승인 2009.06.03  02: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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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의 의미를 맑스의 노동이론, 푸코의 삶권력론, 들뢰즈의 잠재력론, 네그리의 다중론으로 조명한 조정환의 새책 <미네르바의 촛불>을 읽는다. 촛불은 과연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낼 다중/주체인가, 실패한 중간계급의 아들 딸인가. 이 책을 통해 촉발된 조정환-이택광의 논쟁도 함께 살펴본다. <편집자주>

이제야 논의가 시작된 촛불정치

 

   

 

 

<미네르바의 촛불> 조정환 저 (갈무리, 2009)

 

 뛰어난 역사가이기도 했던 칼 맑스는 언젠가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동시대에 발생한 사건들은 그것에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객관성이나 과학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시간적 거리를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맑스 역시 한 마디 덧붙이는 걸 잊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동시대 사건의 역사를 써서는 안 된다는 건 아니라고, 혹은 우리 눈앞에서 진행 중이거나 단지 이제 막 일어났을 뿐인 시점에서 해당 사건의 성격과 의미와 결과의 내적 연관을 분석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건 아니라고.


이런 점에서 “지난 1년 동안 촛불현장에 참가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의 기록이자 그것에 대한 성찰의 산물”인 조정환(다중네트워크센터 공동대표)의 <미네르바의 촛불>은 반드시 주목해야 할 만한 책이다. 흥미롭게도 <미네르바의 촛불>은 촛불시위가 소강상태에 접어들던 작년 8월 말~9월 초부터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일련의 촛불 관련서(촛불시위를 직간접적으로 다룬 계간지를 제외하고도 약 9권) 중 유일하게도 단일 저자가 쓴 책이다. 이 점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 책의 등장이 다른 지식인들의 ‘게으름’을 증명해줘서가 아니라, 옳든 그르든 해당 사건에 관해 일관된 해석을 제시하려 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시도를 했기에 우리는 이 책에 반드시 주목해야 마땅하다.

 

“촛불이 승리한다”의 진정한 의미


조정환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는 “촛불은 승리한다”(67쪽)이다. “승리했다”는 과거형이거나 “승리할 것이다”라는 미래형이 아니라 “승리한다”는 부정사의 현재형임에 주의하라. 조정환에 따르면, “촛불은 승리한다”라는 말은 “사람들=삶들이 낡은/죽은 세계의 변형을 위해 힘을 모으는 (즉, 협력하는) 운동 속에 있음을 표현하는 말”(66쪽)이다. 요컨대 촛불시위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의 성패가 즉각적으로 이러저러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깊고 강한 실천으로서의 촛불되기”(68쪽)의 필요성을 요청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에, 조정환이 말하는 ‘촛불의 존재론적 차원’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조정환은 촛불의 사회정치적 차원과 존재론적 차원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한미FTA와 민영화 등 생명의 안전과 건강을 위협하는 자본의 세계화에 맞서 분출된 촛불의 사회정치적 차원(164쪽)이 외견상 패배한 듯 보여도 환멸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존재론적 차원의 승리능력을 사회정치적 차원에까지 폭발시키고 확산”(10쪽)시키는 것이므로.


조정환이 1장에 해당하는 좥촛불: 유령인가 중간계급인가 다중인가?좦에서 촛불을 둘러싼 ‘촛불의 범죄화,’ ‘정신적 환멸,’ ‘해석의 폭력’ 등을 단호히 비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정환이 보기에 좌우파를 막론하고 촛불의 패배 운운하는 사람들은 “촛불의 살아 있는 힘과 그 능력”(18쪽)을, 즉 존재론적 차원을 부정하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이 말하는 패배 때문에 사라진 것은 촛불이 아니다. 사라진 것은 촛불 이전의 잔재, 다시 말해서 아직 날카로운 계급대립으로까지는 고양되지 않았던 사회적 관계의 잔재가 아닐까?


촛불 이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코 벗어날 수 없었고(또는 달리 다른 방도가 없다고 느꼈고) 결국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게 만든 이러저러한 환상, 관념, 계획 등이 존재했다. CEO출신 대통령이 경제를 살릴 것이다? 알고 보니 IQ가 2MB였다. 주식을 통한 재테크의 꿈?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사태가 한방에 날려 버렸다. 국가의 공공시스템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한미FTA와 관련된 각종 민영화 정책안 발표로 헛물만 켜게 됐다. 학벌로 계층이동을? 어느덧 등록금 1천만 원 시대가 왔다. 대의민주주의? 국민을 바꾸느니 대통령을 바꿔라. 진보진영? 마이크 들고 깝치지 말아라 등등.


그러므로 <미네르바의 촛불>은 <공산당 선언>(1848)의 꿈을 공유하고 있는 책이다. <공산당 선언>처럼 <미네르바의 촛불>도 스스로 서술한 내용을 생산하려고 한다. 일찍이 <공산당 선언>은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계급투쟁을 생산했고,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라고 선언함으로써 노동자를 하나의 계급으로 생산했다.


<미네르바의 촛불> 역시 “오늘날의 권력은 직접적으로 생명과 사회적 삶을 지배”(89쪽)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삶권력’과의 계급투쟁을 생산하려 하고, “촛불운동 속에서 우리는 전혀 새로운 주체들의 부상을 본다”(111쪽)라고 선언함으로써 잡색부대로서의 촛불을 ‘다중’으로 생산하려고 한다. 그것이 “존재론적 차원의 승리능력을 사회정치적 차원에까지 폭발시키고 확산”시키기 위한 조정환의 전략이다.


교복 입은 10대, 팔짱 낀 20대 연인, 하이힐 신고 명품가방을 든 여성 직장인, 유모차 앞세운 주부, 아이들 무등 태우고 나온 가장, 인터넷 커뮤니티 회원, 민주노총의 노동자, 전교조의 교사, 한총련의 학생, 각급 시민단체의 회원, 예비군, 예술가, 작가, 의사, 해커, 노인 등 가지각색의 사람들을 ‘다중’으로 호명한다는 것은 그 각각의 차이를 무시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촛불들의 이 다양함과 특이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다양성과 특이함을 넘어서 서로를 이어주는 공통지반을 찾아내고 이 잡색부대가 매일매일 촛불의 삶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연결될 수 있는 공통되기의 물질적 과정을 창출”(113쪽)하려는 시도이다.


“우리 시대의 모든 진지한 운동들이 발 딛고 있는 로두스”가 바로 여기, “탈근대적 운동의 토대이고 조건”인 “다중지성과 그것의 운동”(143쪽)인 것이다. 그러므로 <미네르바의 촛불>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1장이 아니라 3장(촛불봉기: 다중이 그려내는 새로운 유형의 혁명)과 8장(촛불봉기의 특이성)이다.

 

촛불 이후, 다시 실천이 문제다


이렇게 보면 조정환의 비판 대상이 된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산책자, 2009)의 공동저자 중 한 명인 이택광(경희대 영미문학부 교수)과 조정환 사이에서 오고간 온라인 논쟁의 근본적인 쟁점은 촛불의 성격(‘자율적 봉기’냐 ‘욕망의 정치’냐)도, 촛불의 주체(‘자율적 다중’이냐 ‘중간계급과 이들의 아들딸’이냐)도, 촛불의 결과(‘실패한 중간계급의 행동’이냐 ‘진행 중인 성공’이냐)도 아니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촛불 이후의 대안을 어떻게 모색하느냐의 문제였다. 이택광의 말처럼 “내가 촛불을 ‘비판’하는 이유는 조정환 선생이 촛불을 ‘옹호’하는 것과 같은 이유”였던 셈이다. “‘촛불은 다중이다’라는 명제를 증명하라”며 조정환을 비판한 이택광의 주장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택광은 조정환이 말하는 다중의 특이성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다중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좀더 섬세한 분석이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그런 섬세한 분석을 위해서는 촛불에서 드러난 한계뿐만 아니라 갈등과 대립까지도 직시해야 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논평자의 바람과는 달리 조정환-이택광 논쟁은 “현상기술의 차원을 넘어 이론적 분석과 효과적 저항 전략을 모색”하는 단계로 나가지 못하고 그 문턱에서 좌절했다. 우리는 그 원인을 조정환과 이택광의 지적 엘리트주의에서 찾아야 할까, 아니면 지금 정세의 한계에서 찾아야 할까?


실제로 출간된 뒤(1848년 2월 24일)에는 당대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공산당 선언>이 훗날 역사에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 책 중의 하나가 된 배경에는 40여 년간의 피와 땀이 있었다. 1889년 제2인터내셔널의 창립에 이르는 이 기간 동안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꿈에 자신의 삶을 바쳤다. 우리 역시 이런 상황을 조성하는 데 삶을 바칠 수 있을까?


어쨌건 <미네르바의 촛불>의 저자와 이택광은 이 ‘내기’에 배팅을 걸었고, 이걸 되받을지는 이제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의 말처럼 가만히 두 손 내려놓은 채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촛불을 일으켜 주십사 하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니, 무엇이든 하긴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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