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 / 문화평론가

지난해 촛불집회의 기원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우리 집회할까요?>가 최근 온라인을 통해 개봉, 무료로 배포되었다. 제작자들은 촛불집회에 참여한 우리 모두가 사회와 정치, 역사의 창조자이듯 이 다큐멘터리도 함께 창조한 것이라고 밝혔다. 제작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공동제작의 이유도 들어봤다. <편집자주>


비선형적 현실에 대한 충실한 기록: <우리 집회할까요?>
 

다큐멘터리 <우리 집회할까요?>는 2008년 촛불에 대한 ‘기억’이다. 벤야민의 말처럼 기억이 언제나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 다큐멘터리는 이런 정의에 충실한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다큐멘터리는 ‘영화’이기에 카메라의 시선은 객관의 내용을 표현하지만, 그 방식은 언제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 까닭은 바로 편집 때문이다. 편집자의 주관은 영화의 형식을 결정하고, 따라서 영화의 형식이야말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집회할까요?>가 드러내는 형식은 중요하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형식은 인터뷰와 글이다. 다큐멘터리는 인터뷰와 이를 이어주는 글을 따라 진행한다. 일방적인 내레이션은 없다. 카메라는 묵묵히 이들이 쏟아내는 말을 들려주고, 글을 보여준다. 그것이 특징이다. 그 결과 만들어지는 것은 공감각적 재현이다. 이런 형식이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촛불 자체가 기존의 재현방식으로 그려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촛불은 그 기원부터 어떤 정치적인 범주도 벗어나있던 사건이었다.

 

촛불의 기원, 그 정체성의 탐사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촛불의 정체성이다. 그 정체성을 규명하기 위한 실마리들을 이 짧은 기록영화가 보여주고 있다. 마치 사라진 고대도시의 유적을 발견하는 것처럼, 촛불의 기원을 따라 들어가는 것은 고고학자가 시간의 결에 앉은 먼지들을 털어내고, 그 과거를 고스란히 발굴해내는 일에 가깝다. 그러나 이 세상에 완벽한 복원은 없다. 언제나 복원은 폐허의 발견이고, 이런 맥락에서 촛불에 대한 기억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영화는 시간의 압축을 통해 그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이것은 딜레마이지만, 또한 기록영화의 존재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집회할까요?>는 이런 딜레마를 훌륭하게 드러내고 있다. 도입부에 나오는 촛불문화제를 기획했던 세 사람의 인터뷰는 인상적이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정치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 발언을 단순한 은폐의 수사학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촛불에서 드러난 ‘탈정치성’의 근거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다큐멘터리는 이런 탈정치성의 진실을 밝히려고 한다. <우리 집회할까요?>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문제는 바로 ‘촛불이 어떻게 과거의 것과 다른가’라는 것이다. 촛불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은 촛불을 통해 만들어진 ‘주체’를 점검하는 작업이다. 이 영화는 이 작업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촛불이 어떻게 과거에 존속했던 정치성의 범주를 넘어선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발화의 지점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런 주체성의 탐사에 <우리 집회할까요?>는 충실하다. 그래서 영화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서 현실에 대한 ‘개입’으로서 정체성을 드러낸다. 물론 그 방식은 카메라를 다층적 현실에 충실하게 들이대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이 다큐멘터리가 구현하고 있는 인터넷의 매체성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집회할까요?>는 단순한 기록영화에 머물러 있지 않으려고 한다.


인터넷의 매체성을 다큐멘터리의 형식성으로 훌륭하게 차용한 경우가 교육방송의 ‘지식채널-e’일 것이다. <우리 집회할까요?>에서도 이런 방식을 되풀이해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런 형식성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매체성은 결국 사유의 구조를 함의한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우리 집회할까요?>는 촛불에서 드러났던 ‘비선형적 구조’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이렇게 다층적이고 복합적이었던 촛불의 시작이 어떻게 서서히 ‘이명박 반대’라는 하나의 정치성으로 수렴되었는지이다.


비정치성의 한 가운데에서 발생한 정치적인 것의 출현은 ‘국민’이라는 일의적 재현체계에 발생한 균열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중간계급의 공포에서 출발한 촛불에게 자신의 한계를 넘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것처럼, “공부에 집중해야하는 학생에게 정치를 강요하는 이 정권은 나쁜 정권”이라는 한 10대 청소년의 발언은 ‘정치’라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의식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10대의 발언에 담겨 있는 그 탈정치적인 내용이 아니다. 문제는 이렇게 ‘발언권’을 갖지 못했던 ‘몫이 없는 자들’에게 무대와 마이크가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기존의 인식체계를 깨뜨리는 정치적인 것이 출몰한다.

 

비정치성의 한 가운데서 정치적인 것의 출현

 


<우리 집회할까요?>라는 다큐멘터리에 담긴 미덕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는 ‘판단’보다도 ‘발언’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촛불은 일의적인 것이 아니라 다의적이고 다층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초기에 촛불문화제를 조직했던 ‘비정치적인 카페지기들’에게 이른바 ‘운동권들’이 개입했던 사실에 대한 진술이었다. 한 마디로 정치집회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이들을 ‘지도’하려고 했던 그 운동권의 전략이 얼마나 무용한 것이었는지, 이 다큐멘터리를 보는 관객이라면 뚜렷이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촛불은 무엇보다도 정치 자체의 위기에 대한 대체보충으로 출몰한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촛불은 정당정치라는 합의적 민주주의의 위기를 드러내는 것이자, 동시에 운동권의 종언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거기에 지도할 수 없는, 아니 지도를 거부하는 ‘국민들’이 있었다. 이 국민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데모스(demos)이자 동시에 완벽한 치안을 갈구하는 인민이었다. 국가와 맺은 계약관계를 뚜렷이 인식하는 이 인민들이 촛불을 통해 이명박 정부에게 무엇을 요구한 것인지를 <우리 집회할까요?>는 명쾌하게 보여준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