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 / 성공회대 노동사연구소 연구원


폭력은 모두 악인가. 모든 폭력은 비난받아야 하는가. 폭력의 20세기를 지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도처에 만연한 폭력을 목격하고 있다. 이번 기획에서는 다양한 폭력담론을 비교·분석해 봄으로써 폭력의 본질과 영향, 그 메커니즘을 고찰해보고 그것의 정당성과 한계, 대안에 대해 고민해본다. <편집자주>
 

   1896년 5월 11일 황해도 치하포의 아침. 스물 한 살의 청년이 주막에 들어가 손님 중 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청년은 남자를 걷어차고 칼로 난자하여 살해했다. 그리고 뿜어 나오는 피를 손으로 받아 마시고 얼굴에다 바른 뒤, “이 자를 바다에 던져 물고기들이 즐겁게 뜯어 먹도록 하라”고 외쳤다. 이 엽기적인 사건의 주인공은 백범 김구이다. 그리고 그가 죽인 남자는 민간인으로 변장했던 일본군 장교 ‘쓰치다’였다. 김구는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응징으로 일본인을 죽였다고 주장했으나, 쓰치다는 시해사건의 직접 관련자가 아니었고 최근까지도 그가 군인이 아니었다는 논란이 있다. 이후 김구는 체포되어 인천 감옥에 수감되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김구는 테러리스트인가 아니면 영웅인가? 여기서 혁명과 폭력의 주제가 등장한다. 전쟁과 혁명 상황에서 폭력은 정당화된다. 한 국가의 위대한 장군은 그 상대 국가에서는 잔혹한 학살자가 된다. 시공간의 변화에 따라서 같은 사건과 인물이 의거(義擧)에서 테러로, 영웅에서 침략자로, 항쟁에서 난동으로 바뀐다. 결국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주장은 현실적인 판단이 아니라 가치에 대한 선택일 뿐이다. 절대적 비폭력주의는 특정 사상이나 종교를 선택하는 것과 같은 차원의 담론이다. 가치판단의 문제와 달리 현실에 존재하는 폭력은 언제나 중요한 정치적 문제였다.

악평에 가려진 소렐의 폭력론


   조르주 소렐(Georges Sorel)은 폭력의 정치적 성격을 분명히  인식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폭력을 옹호하고, 폭력을 예찬했다는 식의 평가는 소렐의 논의를 축자적으로 이해하거나 왜곡한 것에 불과하다. 소렐이 무정부주의 좌파이론인 생디칼리즘을 버리고 민족주의 우파를 지지하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 파시즘의 정당화에 기여하게 된 특이한 경력이 그에 대한 악평을 더욱 확산시켰다. 하지만 그의 이념이 좌파에서 우파로 선회하게 된 것은 당시 좌파 운동의 순수성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말년에 그는 우파 정치에 대해서도 희망을 버리고, 다시 소비에트의 레닌을 지지하는 짧은 글을 발표한다. 그가 더 생존했더라면 레닌에 대한 지지 역시 철회했을 것이지만 말이다.
   현실에서 그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정치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역으로 그의 이론은 여러 정치집단들의 선전에 동원되었다. 좌파는 소렐의 무정부주의적 기질과 이념적 변덕을 비판하며 타협적 의회주의를 정당화했다. 우파는 소렐의 명성과 지지를 정치적 선전에 이용했다. 특히 무솔리니는 “내가 가장 큰 빚을 진 사람은 바로 소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소렐이 그토록 원했던 순수하고 숭고한 역사적 순교자의 역할을 수행하려는 정치집단은 등장하지 않았다. 소렐이 말하는 폭력(violence)이란 바로 패배할 줄 알면서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적 소수자 또는 피지배계층의 투쟁을 일컫는 말이었다.
   소렐은 <폭력에 대한 성찰>에서 폭력이란 ‘무력(force)을 사용해서 형성·유지되는 소수의 지배, 그 사회질서의 파괴를 지향하는 것’이라 정의했고, 구체적으로는 노동자계급의 총파업과 직접행동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여기서 폭력은 억압적인 지배질서를 전복하는 집단적 힘의 발현이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구체적 행위가 아니다. 소렐은 정당한 혁명의 사회적 가치를 옹호한 것이다. 누군가 ‘정당한 목적에 맞는 정당한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내가 말하는 폭력은 정당한 힘이고, 부당한 힘은 무력이다’라고 웃으며 답할 것이다. 폭력과 무력을 구분하면서 폭력을 긍정적 의미로 정의한 데서 그의 배짱이 느껴진다.
   소렐이 보기에 폭력은 압제자들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그리고 적대적 두 진영이 가지고 있는 갈등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분명한 방법이기도 하다. 계급관계에서도 어설픈 협상과 타협은 언제나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투쟁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충족시키는 거짓 대리인들만을 양산할 따름이다. 소렐은 말한다. “부르주아여, 당신들의 일(지배)에 전념하라.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일(저항)을 하겠다.” 계급갈등을 분명히 해주고, 모호해진 계급구조를 다시 세우는 것이 폭력의 역사적 역할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서 단순한 ‘폭력예찬론’만을 도출해내는 사람은 여전히 혁명의 역사적 맥락을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렐은 폭력이 전쟁이나 혁명 상황 속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정당성이 결여된 정치체제와 노골적인 착취구조의 자본주의 체제 하에 살아가던 노동계급에게 세계는 전쟁터와 다르지 않다. 소렐은 “진정한 윤리성이란 존재하는 폭력(가시적인 그리고 비가시적인)을 비판하고 단순히 평화를 갈구하는 일이 아니라, 폭력으로 현상하는 사회 내부의 일종의 ‘전쟁상태’를 분명히 인식하는 일이다”라고 강조했다. 모든 숭고한 윤리는 전쟁상태 속에서 활성화되어 왔으며, 근본적인 문제해결 없이 오직 중재와 타협으로 점철된 사회는 점차 그 숭고한 윤리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작 문제는 그 전쟁상태를 누가, 어떤 기준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소렐이 활동하던 시기와 오늘날의 정치경제가 과연 동일한 전쟁상태라고 볼 수 있을까. 과연 지금이 혁명이 필요한 시기인가. 소렐의 주장을 확장해보면, 그러한 판단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혁명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지배세력은 ‘비폭력’을 말하기 때문이다. “민주정치는 그것이 어떠한 형태든 폭력을 부정하는 전제 위에 이루어집니다”라고 말한 것은 광주학살의 주범이었던 두 전직 대통령들이었다. 시공간을 초월한 폭력론은 현실에 맞지 않는다. 거시적인 역사적 시공간 속에서 폭력이 어떻게 드러나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소렐은 고민했던 것이다.

폭력의 역사적 역할


   그러나 소렐은 구체적인 폭력의 양상과 그 부작용 등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은 한계를 갖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더 민감한 문제는 혁명의 역사적 정당성이 아니라, 시위과정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물리적 충돌이다. 추상적 차원에서 이는 국가의 폭력독점에 대한 정당성 문제로 이어진다. 국가의 주권에 대한 정치이론은 모두 가설이나 신화에 가깝다. 특정 시민 또는 계급이 자신의 판단에 근거하여 정당한 폭력의 기준과 단계를 세우고 합당하게 행사한다면, 국가의 폭력 독점이라는 신화를 극복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수준에서는 폭력사용의 전술 문제로 이어진다. 저항세력의 폭력은 보다 더 조직화되고 더 훈련되어야 할 것이다. 폭력의 부작용이 돈의 부작용보다 더 크다고 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 위력과 더불어 그 힘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폭력은 고통을 유발하고 유치한 느와르적 폭력미학과 영웅담의 정치조작으로 타락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인천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1896년 11월 사형선고를 받고 그 집행을 목전에 둔 김구의 사연을 알게 된 고종은 한 달 전에 설치한 조선 최초의 전화를 이용해서 사형집행을 극적으로 연기시켰다. 전화기 한 대가 역사를 바꾼 순간이라 해야할까? 이 사건을 평가하는 다양한 방식에 따라서 폭력 문제에 관한 여러 논쟁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저항폭력 문제를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일도 현재와 미래의 저항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데 꼭 필요한 선결과제라고 생각한다.
   폭력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힘이다. 에릭 홉스봄도 ‘모든 폭력은 비폭력보다 나쁘다’는 추상화된 도덕적 일반화는 현실적인 폭력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서, 그것이 오히려 ‘모든 폭력이 선이다’라는 주장을 양산시킬 뿐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최근 폭력과 비폭력 간의 이분법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모색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논리를 개발하는 것만으로 이 문제가 속 시원히 해결될 것 같지 않다. 현실주의자들에게 폭력은 칼이다. 문제의 본질은 칼 또는 칼의 개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 쪽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칼을 쓴다고 다 ‘조폭’은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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