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세계문학전집의 세계

한국문학은 세계문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한국에서 출판된 문학전집의 면면을 살펴보면 세계문학이란 곧 유럽문학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대담에서는 유럽중심으로 진행되던 문학교류에서 벗어나 제3세계 문학과도 폭넓게 교류해야 할 한국문학에 대해 이야기해본다. <편집자주>

 

오창은(이하 오): 인문학의 위기가 운운되는 시기에 문학전집 발간이 최근 활기를 띠고 있어요. 창비에서도 그렇고, 문학과지성사에서도 그렇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도 간행됐고요. 이제까지 한국에서는 ‘세계문학’하면 우리 문학을 빼고 전집이 기획되는 이상한 관행이 있었어요. 민음사판은 한국작가를 포함한 세계문학전집이라는 점에서 조금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지만 여전히 서구문학 중심이라는 점에서 아쉬운 면이 있습니다.

이명원(이하 이): 하긴 이상한 관행입니다. 세계문학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유럽문학 일색이었죠. 동시에 제대로 된 한국문학전집이 있느냐는 점도 생각해봐야할 문제입니다. 요즘 여러 전집들이 나오고 있지만, 그것이 과연 한국문학의 정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거든요.

오: 1960년대 초 유럽이나 미국에서 유학한 전공자들이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새로운 판본의 세계문학전집들이 나오기 시작했지, 실상 195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문학전집류는 모두 일본판을 복제한 것이었죠. 이 선생님 말씀처럼 우리가 정전으로 생각하고 있는 세계문학의 고전들은 실은 일본 관점의 한국적 수입이라는 측면에서 기형적이에요.

이: 그렇습니다. 게다가 유럽 이외의 문학에 대한 관심은 턱없이 부족했지요. 동아시아 문학은 삼국지를 읽는 수준에서 훌쩍 건너뛰어 루쉰을 읽는 식으로 나아가는 사례가 그것입니다. 게다가 사회주의권과의 수교가 없었던 80년대 후반까지는 동유럽권의 문학도 번역이 안 되었어요. 제3세계는 말할 것도 없고요.

오: 문학사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197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제3세계문학에 대한 관심이 한 때의 유행으로 그친 것이 아쉽습니다. 그 때 해방신학을 중심으로 남아메리카 문학이 많이 번역, 소개되었어요. 하지만 1980년대를 거치면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후퇴하는 양상을 보였어요. 그런 분위기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 같고요.

이: 사실입니다. 다만 19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가령 응웬반봉의 <사이공의 흰옷>이라든가, 고리키의 <어머니>, 체르니셰프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와 같은 이념형 문학이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커다란 의미를 갖습니다. 국제주의적 관점에서의 세계문학이라는 시각이 비로소 생성되기 시작했으니까요. 라틴 아메리카 문학 같은 경우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통해서 번역의 통로가 열렸구요.

오: 문학이 개별 국가의 언어로 창작된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 감성에 대한 보편적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과도한 유럽중심주의는 경계해야 할 것 같아요. 마치 문학작품도 선진국이 있고 후진국이 있다는 식의 천박한 인식이 유럽중심의 세계문학에 침윤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사실 세계문학이라는 이념에 대해 처음 생각했던 괴테에게 진정한 세계문학은 각각의 국민문학이 수평적으로 평등하게 분립하고 있는 문학적 총화를 의미한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일본식의 문학관점이 식민지시대에 일반화되다 보니, 그런 옥시덴탈한 세계문학 관념이 일반화된 셈이죠. 물론 오늘날에는 사정이 바뀌어가고 있습니다만.

오: 1975년에 로터스 문학상이라고 김지하 시인이 수상한 문학상이 있지 않습니까? 그즈음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과의 구체적 연대와 실질적인 교류가 있었어요. 그런 분위기가 1980년대 후반부터 끊긴 것이죠. 돌이켜 보면, 한국사회가 세계문학에 대한 관점을 변화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그러한 전통이 한동안 끊겼던 것 같아요.

이: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회의’ 역시 결국은 미·소간의 냉전이라는 외부적 힘에 의해 중단된 셈입니다. 그런 가운데도 가령 윤흥길 같은 작가는 일본에도 번역되어 매우 깊은 인상을 남긴 경우죠. 나카가미 겐지와 윤흥길의 교류가 어쩌면 실체화된 한·일간의 문학적 교류의 중요한 계기였고, 그것이 1980년대까지 이어졌죠. 김지하에 대한 일본문단의 관심도 그렇고요.

오: 저도 개인적으로는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의 교류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없었어요. 그런데 2007년 전주에서 열린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대회’에서 학술담당 코디네이터로 참가하면서 세계문학과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 그리고 동아시아 문학에 대한 관점을 갖게 되었어요. 비판도 받았지만 한국사회가 아시아 아프리카의 문화영역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지 모색한다는 측면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저도 중요한 계기였다고 생각해요. 다만 교류의 지속성이 문제겠지요.

오: 문학은 번역을 통한 교류 아닙니까. 그런 측면에서 행사보다는 행사 이후에 서로의 언어로 수평적으로 번역되어 읽히는 것이 진정한 교류인 것 같아요.

이: 특히 제3세계는 공동의 체험이 있지 않습니까.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공유했고, 2차 대전 이후 탈식민화를 경험했으니까요. ‘경험의 내밀성’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공통분모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의 연대에 대해 실질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것이겠죠.

오: 2007년 이후, 계간 <아시아>에 실리는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유념해 읽게 되었어요. 그 중 울찌툭스의 <수족관>이라는 작품이 ‘경험의 내밀성’ 측면에서 눈길을 끌더군요. 유럽중심의 문학을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무의식에 일침을 가하는 효과를 발휘했다고나 할까요. 특히 몽골에 대한 한국인의 편견을 과감하게 깨는 작품이었어요. 아파트에서 느끼는 현대성의 경험 같은 것이 잘 형상화되어 있었거든요.

이: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과 같은 동아시아 문학은 공통분모가 많습니다. 또 이 지역의 역사는 서로간의 근친/화간의 관계를 맺고 있기도 하지요. 그래서 그런지 한국에서도 중국, 일본, 베트남 문학이 요즘엔 많이 읽히고 있지요.

오: 베트남문학 중에서는 응웬 옥뜨의 <끝없는 벌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응웬 옥뜨는 베트남에서도 차세대 작가로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베트남작가들이 전쟁 이후의 상처에 관해 지속적으로 형상화해 왔다면, 이 작가는 당대의 아픔을 예민한 감성을 소유한 여성의 시선으로 그려냈죠.

이: 응웬 옥뜨는 최근의 젊은 작가들 가운데 가장 의미있는 작가입니다. 베트남사회의 모순을 아주 리얼하게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있죠. 관료제의 모순을 고발하는 젊은 작가의 출현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에요. 가령 중국에서 응웬 옥뜨처럼 공산당체제를 비판하는 작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오: 저는 한국문학을 전공하지만, 아시아의 당대 작가들의 작품을 꼼꼼히 읽다보면 신선한 충격을 받습니다. 작가들이 처해 있는 현실은 다른 듯하지만, 인간의 내면이라는 것이 문학언어를 통해 이렇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죠. 그리고 근대성의 폭력이 아시아의 약한 고리에서 얼마나 무자비하게 자행되고 있는가 하는 부분을 간접체험하기도 하고요. 울찌툭스나 응웬 옥뜨가 그 예인 것 같아요.

이: 사실 구미 문학권에서 활동하는 거의 대다수의 유력 문인도 다 제3세계 출신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문학이란 것이 매우 근대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죠. 때문에 후기근대적 문화로 이행해가는 문명사적 단계에서는 속물적인 오락물만이 범람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문학의 주된 섹터는 이런 제3세계에 있다는 것을 말하죠. 말해야 될 또는 고백해야 될 진정한 ‘내면’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 아쉽지만 벌써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네요.

이: 문학은 근대의 산물이고, 근대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제3세계의 지식인들은 문학을 통해서 이를 심각하게 고민해왔어요. 그들은 고백해야 될 공동의 기억과 내면이 있었고, 이것이 이들의 문학을 충만하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정은 비슷해요. 가령 요즘 중국작가들의 약진은 그것을 보여주지요. 그런 점에서 문학은 약소자들의 ‘아가리’를 요구하는 듯 하군요. 오늘은 이만 퇴장해야겠네요. 수고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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