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호 / 서양화학과 석사과정

내 책상 위에는 유난히 애착이 가는 작은 화분이 있다. 생기 넘치고 화사한 꽃을 피울 수 있는 화분이라서 아끼는 것이 아니다. 사람으로 치면 오히려 장기를 도려내고 죽음의 문턱을 두 번이나 넘긴 작은 난초이다. 이 화분은 내가 화가의 길을 선택한 후,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내 책상 위를 지키고 있다.
처음 내 손에 이 난초가 들려졌을 때는 뿌리 없이 줄기에 꽃만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한 달 정도 지나니 꽃은 말라서 떨어지고 누렇게 변한 잎사귀들도 힘없이 줄기에 붙어 있을 뿐 곧 떨어지려 했다. 이제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일만 남은 난초를 살려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난초는 일반적인 화초와 다르다. 비옥한 흙과 충분한 물은 난초에겐 독약과 같다. 오히려 시련이 필요하다. 척박한 흙과 건조한 환경이 줄기만 남아있는 난초에 새싹과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해준다. 한 달이든 두 달이든 기다려야 한다. 말라서 쭈글쭈글해지는 줄기에서 연둣빛 새싹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결코 물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한 달 만에 새싹을 볼 수 있었다. 그 순간의 기쁨은 기나긴 창작의 고독을 지나 작은 실마리를 찾았을 때와 같은 즐거움이었다. 그 싹이 새끼손가락 크기 정도로 자랐을 때 흙이 있는 화분에 심어 대학원 지하 2층의 실기실로 옮겼다. 화분 안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자리를 잡아 나가던 난초는 잎사귀의 수도 늘어나고 한동안 잘 자랐다.


하지만 습하고 어두운 환경이 난초에게는 새로운 시련이 되었나보다. 새싹의 잎사귀는 누렇게 변색되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어렵게 얻은 싹은 다시 죽음을 향해서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잎사귀가 모두 떨어지고 다시 앙상한 줄기와 뿌리만 남았을 때, 난초의 모습은 너무나도 괴이했다. 줄기에 다른 줄기가 자라있고 뿌리 몇 가닥이 남아있는 추하고 볼품없는 모습 때문에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초라하고 괴이한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가꾼다는 것이 대학원 생활의 고단함 속에서 점점 귀찮아졌지만 결국 버리지 못하고 다시 싹을 틔워 지금은 10cm의 크기로 자란 상태이다.


이렇게 여리고 볼품없는 생명을 위해서 책상의 한 켠을 내어주고 신경을 쓰는 이유는 난초와 함께 대학원 생활과 창작의 길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작업세계를 찾기 위한 고독한 노정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해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해준 어떤 상징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초라한 난초는 어찌 보면 성장해가는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책상에 앉는 순간마다, 나는 힘겹게 성장하고 있는 초라한 난초를 보는 것이 아니라 희망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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