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근 / 파리 7대학 지리학과 박사수료

도시계획은 사람들의 경제행위를 규제한다. 초고층 빌딩의 개발을 막기도 하고 술집영업을 금지하기도 한다. 개인 이익추구라는 자본주의의 근본을 조장하기도, 막아서기도 하는 도시계획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대부분의 도시계획가들은 이를 토지이용의 ‘합리화’에서 찾는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합리화인지가 중요하다. 돈을 절약하기 위한 합리화인가, 아니면 사람의 편의를 최대화시키기 위한 합리화인가. 현재 ‘디자인’이라는 이름 아래 펼쳐지는 공간정책에 대해 생각함에 있어서 이 질문은 비판의 핵심이다.

■ 호텔링 모델의 조감도
■ 호텔링 모델의 조감도
경제학자 호텔링(Hotelling)은 1929년 <경쟁의 안정화>라는 논문에서 이후 공간정책에 정부가 개입하게 된 근거를 마련해준 유명한 모델을 제시했다. 해변에 모든 조건이 똑같은 아이스크림 가게가 둘 있다면 어디에 위치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가. 손님이 가장 가까운 가게로 갈 것이라는 기본 가정이 있는 한, 가게는 해변의 가운데에 나란히 입점해 손님들을 반으로 나눠 갖는다. 반면 이들의 입점위치를 규제해 1/4, 3/4지점에 배치하면 매출액은 변하지 않지만 대신 손님들의 총 이동거리가 절반으로 준다. 즉, 공공이 개입하기 전이나 후에 가게주인의 소득은 변하지 않지만 소비자 편익은 두 배가 증가하게 된다. 바로 이런 근거로 자유시장에서의 정부 공간통제가 정당화되었다.
물론 경제학의 비현실적인 가정들로 인해 호텔링 모델은 현실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도시정부는 언제나 공익을 위한다고 말해왔고, 위 모델을 통해 이를 정당화했다. 용도지역지구제라 불리는 도시계획의 핵심수단들은 개별 필지들 간의 ‘형평성’이 성립하지 않는 건물의 용도규제 및 크기규제를 해왔으며, 공익을 위한 도로를 놓는다며 민간의 땅을 수용하기도 해왔다. 즉, 호텔링의 예에서 표현된 ‘소비자의 총편익’이라는 사회의 ‘공익’이 언급되지 않았던 도시정책은 없었다. 심지어 이명박 시장 재임시절의 청계천공사도 서울시민의 편익 증가를 위한 것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렸었다.

 

‘공익’이 아닌 ‘이익’의 합리화

 


오세훈 서울시장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디자인 서울’사업이 전임시장과 비교하여 더 개발중심이며 공익을 무시한다고 볼 수는 없다. 공익을 표방했던 사업들에도 언제나 도시개발의 폭력성은 있었다. 문제는 도시정책의 패러다임이 변한 것에 있다. 현재의 도시정책은 좋든 싫든 공익을 표방해야만 했던 이전의 담론환경과는 다르다. 이러한 현재의 디자인 담론을 사스키아 사센은 “탈국가화되고 사유화된 질서”라고 말한다. 즉, 공공적 질서가 아닌 사적 질서에서 연유했다는 것이다.
‘세계도시’를 비판하면서 사센은 도시에서 국가와 공공성이 사라지는 부분들을 포착하며, 그 주범으로 세계화된 자본의 흐름을 지목한다. 세계자본은 금융시장과 같은 자본통제기능에 보다 의존하게 된다. 공장은 세계 어디에나 있어도 되지만 이들을 통제하는 기능은 점점 더 문화자본이 복잡하게 축적된 세계도시로 집중되고, 부의 대부분은 이들 통제기능에서 창출된다. 이를 위해 국가와 대도시정부는 세계자본의 네트워크와 소통할 수 있는 ‘초국가적 엘리트’들에 의해 경영되며, 이들의 사적규범이 공공성을 압도한다는 것이 사센의 주된 논지이다. 즉, 세계도시로 성장하기 위해선 탈국가화된 엘리트들을 유치해야만 하고, 이들이 원하는 특목고를 세우고, 깔끔한 환경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명품도시’, ‘디자인 도시’ 등은 단순한 공간환경 개선 이상을 의미한다. 도시정책에 있어서 ‘합리화’의 주 대상은 공익이 아니라 자본의 ‘이익’이다. 예전 토지이용의 합리화는 자본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공공의 편익을 증진시키는 것이었으나 이제는 세계자본을 유치할 만큼 깔끔한 무대를 만드는 작업이다. 그 결과 도시는 사회적일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이중적’이 된다. 고층빌딩으로 상징되는 쾌적한 환경은 저임금노동자의 노동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고급노동자들을 유치하기 위한 ‘과잉임금’을 충당하는 것은 저임금노동자 풀의 확대를 통해 확보되는 ‘저임금상태’의 항구화이다. 이로 인해 세계도시는 언제나 이주노동자들을 받아들여야만 하고, 명품도시 이면에는 이들이 사는 빈민촌을 필요로 하게 된다.

 

공익이 실종된 디자인 도시


이러한 문제 인식에서 ‘디자인 서울’을 생각해보자. 청계천 개발을 통해 도심에서 경제행위를 영위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터전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기반시설이 충분한 도심의 비싼 땅을 좀 더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 공익에 더 부합한다는 나름 공공적인 개발이데올로기들이 있었다. 반면 ‘디자인 도시’는 무슨 이론에 근거하고 있는가? 이데올로기로 배포되는 담론은 없다. 도시정부는 ‘디자인’을 ‘공익’으로 연결할 그 어떤 지식체계도 형성하지 않았고, 또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공익’을 다른 말로 은폐해버리며, 단지 ‘이제 우리 품격 있게 삽시다’ 정도의 무책임한 언사들뿐이다.

■ 기습철거된 서울시청 청사
■ 기습철거된 서울시청 청사

이처럼 ‘디자인 서울’의 근저에 깔린 자본의 역동은 명확하고, 결국 누군가의 피해를 요구한다. ‘디자인 서울’에 투자된 정부예산은 어떻게든 다른 형식으로 회수가 되어야 하지만, 지금껏 깔끔한 도시가 더 나은 생산력을 가져왔다는 경제보고서는 찾기 힘들다. 설령 역사문화를 이용한 스펙터클한 도시가 되어서 모자본의 유수기업들이 도쿄와 상하이를 버리고 서울을 택한다 하더라도, 서울시민은 그들의 높은 임금을 보충할 만큼 늘어난 저임금 노동자 풀을 바라볼 것이다. 물론 공간환경 개선은 필요하고, 꽃단장한 반포분수와 노들섬 문화공간도 필요하다. 문제는 이를 향유할 수 없는 저임금노동과 비정규노동에 종사하는 서울시민이 더 늘어가는 지금, 그런 프로젝트를 서울시 공간정책의 화두로 정했다는 것, 도시정책에서 ‘공익’이라는 말을 지웠다는 것에 있다. 디자인 도시 조성의 성공과 실패 모두 서울시민 입장에선 비극적인 ‘공익’의 실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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