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우 / 문화평론가

<뉴레프트리뷰>
마이크 데이비스 외 지음 / 김정한 외 옮김 (길, 2009)
 

 

 

 

 

 

 

 

 

 

 

동시대 정치·이론·문화의 치열한 담론장

세계적 경제위기는 단지 경제 부문의 위기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위기를 감지하게 한다. 다만 경제위기의 본질이 신자유주의라는 허상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커다란 수확이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의 파급으로 인해 위기와는 전혀 관련 없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 더 큰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우리는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최근 한국에서 처음 발간된 한국판 <뉴레프트리뷰>는 이러한 위기를 진단하고 현실을 분석하며, 전망과 대안을 제시하는 논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뉴레프트리뷰>는 대안 없는 시대에 대안을 찾기 위한 논쟁을 담아내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담론장이다. <뉴레프트리뷰>는 지난 2000년, 변화하는 정세에 맞게 새로운 출발을 하면서 다시 제1호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나온 한국판은 그 이후 8년 간의 대표적 성과를 골라 묶은 특별 모음집이다. <뉴레프트리뷰>가 격월간으로 발행되는 것과는 달리 한국판은 1년에 한 번씩 발간될 예정이다.


현시점에서 한국판의 발간이 더욱 의미있는 까닭은 한국사회가 이론적·정치적으로 위기에 봉착해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학계에서 벌어진 치열한 담론 논쟁은 1990년대 초반에 한풀 꺾이긴 했지만, 이후에도 새로운 영역에 대한 탐구와 다양한 요구에 따라 해외 이론의 유입과 그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어 왔다. 하지만 IMF라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과 더불어 사회와 경제뿐만 아니라 학문 전반에 있어서도 침체가 거듭됐다. 비교적 호황기였던 1990년대를 보내다 경제적 공황상태에 따른 혼돈과 성찰은 1990년대 초반의 이데올로기적 전환의 충격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런 상황이 이미 한국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이론적·정치적 위기 속 한국판 발간의 의미

 


<뉴레프트리뷰>의 핵심영역 세 가지는 정치·이론·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정세에 대한 민감성, 이론적 분석능력, 그리고 대중의 일상생활에 대한 관심이다. 그런데 2000년에 잡지의 혁신이 이뤄진 것은 비록 핵심영역이 폐기되지는 않더라도 그 영역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변화의 계기들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탈사회주의 시기의 도래, 정당운동의 종말, 자본주의의 위기 출현이다. 두 번째는 맑스주의 이론의 주변화 가능성이다. 세 번째는 대중문화의 저항성이 포섭되고 시각문화를 중심으로 진행된 문화의 탈정치화이다.


전지구적 변화와 더불어 지역적 특수성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뉴레프트리뷰>는 중요한 공헌을 할 수 있다. 편집자들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특히 2000년대에 쇄신을 통해 목표로 하고 있는 정세 판단을 공유하면서, 이것이 한국 상황에도 마찬가지로 작동함을 재확인하고자”하며, 이를 통해 “전지구적 차원에서 현 시기 정세에 대한 객관적 분석의 시야를 넓히기 위해 함께 노력하고, 동시에 운동의 전망을 둘러싼 논쟁점을 확대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현재로서 한국판 <뉴레프트리뷰>는 초판을 발행한 지 한 달 만에 재판을 찍는 등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출발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이론적 현실을 고려할 때 그러한 목적을 얼마나 이룰지는 두고 볼 일이다. 무엇보다 <진보평론>이나  <문화과학> 등 한국의 좌파담론 학술지들의 영향력이 줄어든 현실에서, ‘수입 담론’에 대한 열광에 그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그래서인지 편집자 서문에서는 이 책이 “단순히 ‘이론 수입’이나 ‘정보 제공’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전지구적 차원의 정세 판단과 쟁점 개입


결국 한국판 <뉴레프트리뷰>의 출간이 한국사회의 좌파담론에 활기를 불어넣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내년에 창간 50주년을 맞는 <뉴레프트리뷰>의 힘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이론적·세대론적 논쟁과 발전을 통한 끊임없는 쇄신의 결과인 듯하다. 이에 반해 한국의 자생적 담론은 왜 침체를 면치 못하는 것인가. 그 원인은 상호소통과 논쟁의 결핍 때문일 것이다. 이론적 층위의 소통은 물론이거니와 세대간 소통의 단절이 문제다. 이제 좌파 혹은 진보진영의 ‘고령화’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페리 앤더슨은 <뉴레프트리뷰>를 창간하면서 잡지의 일관된 기조를 ‘비타협적 현실주의’라고 언급했다. 그것은 지배체제와의 협력 거부, 그리고 그 힘을 과소평가하려는 온갖 완곡어들과 경건주의의 기각이다. 이 말은 “세계화를 낳는 시장 확대를 둘러싸고 지금까지 벌어진 대응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상 대중들의 반발이었다”는 앤더슨의 진단과 맞닿아 있다. 그것은 결국 담론이 자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동시에 인류 역사상 가장 어렵다는 신자유주의와의 싸움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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