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준모 / 사회진보연대 정책위원

신자유주의와 대안 경제체제의 갈림길

지난해 가을부터 본격화된 이번 경제위기는 미국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여파는 세계 곳곳에 미치고 있다. 유럽도 예외일 수 없다. 유럽은 각국 경제의 규모와 특징에 따라 그 위기의 양상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유럽 내에서 사정이 가장 나쁜 지역은 동유럽이다. 외채와 해외자본 유치에 의존해 경제를 성장시켜 왔던 동유럽 국가들은 자본이 이탈함에 따라 심각한 금융위기에 직면했다. 특히 대외채무 비중이 높고 경상수지 적자 규모가 큰 헝가리, 우크라이나, 라트비아는 이미 IMF의 구제금융을 받았고 루마니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도 곧 구제금융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스페인, 아일랜드, 그리스 등 유럽의 중진국가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스페인은 정부의 과도한 재정적자가 문제인데 실업률도 올해 1월 14.8%로 유럽 최고치를 기록했다. 스페인과 함께 유럽 내 부동산 가격 상승을 선도하던 아일랜드는 거품 붕괴로 정부의 재정이 크게 악화되었고 금융불안 역시 계속되고 있다. 유로지역 국가 중 신용등급이 가장 나쁜 편인 그리스는 GDP대비 경상수지 적자가 유로지역 최고인 14%를 상회하고 있고 GDP대비 부채도 2위인 94%를 기록하고 있다.


유럽의 경제 강국인 독일, 프랑스, 영국도 세계적인 위기를 피하지 못했다. 독일의 올해 경제성장률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저인 -2%대로 예상되고 있다. 프랑스 역시 종전 후 최악의 경제성장률이 예상된다. 금융산업 위주의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는 영국의 경우에는 은행부실과 파운드화 가치급락으로 국가부도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유례없는 위기에 대한 임기응변식 대응


유럽에서 전개되는 경제위기의 진행 양상이 상이하고 그 규모와 폭이 유례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정합적인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임기응변식으로 발표되고 있는 유럽 주요국가의 대응책을 실물경제의 추가적인 침체를 막기 위한 경기부양정책 중심으로 살펴보자. 우선 EU 차원에서 보자면 작년 12월 12일 EU 정상들은 EU GDP의 1.5%인 2천억 유로 규모의 경기부양책에 합의했다. EU 회원국들이 1천700억 유로의 경기부양책을 마련하고 나머지 300억 유로는 유럽투자은행에서 별도의 지출방안을 세울 계획이다. 경기부양책의 내용으로는 부가세율인하, 중소기업지원, 고용지원, 기업투자촉진 등이 제시되고 있다.


200억 파운드의 경기부양책을 추진 중인 영국은 먼저 가계소비 진작을 위해 올해 말까지 부가가치세율을 17.5%에서 15%로 인하했다. 이에 따라 약 120억 파운드 규모의 감세효과가 발생한다. 또 30억 파운드 규모의 공공투자예산을 조기에 집행하고, 중소기업 지원을 위해 법인세율 인상을 연기했다. 프랑스는 지난 2월 2일에 공공투자, 기업지원, 주택건설을 골자로 하는 260억 유로의 경기부양책을 발표했다. 우선 직접적인 경기부양 효과를 위해 공공건물 개보수와 철도·전력 등 사회기반시설 확충에 중앙정부·지방정부·공기업이 106억 유로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또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하는 공공주택 10만 채 건설과 에너지 효율을 위한 주택 개보수 비용 지원 등 주택정책에 12억 유로를 지원하고, 고용유지와 저소득층 지원에 각각 12억 유로와 7억 유로 투자를 결정했다. 그러나 각종 감세와 환급을 통한 기업에 대한 지원이 114억 유로에 이르고 자동차산업과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 등 기업에 대한 지원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유로지역의 실업률은 올 1월에 8.2%까지 높아졌다. EU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올해에는 9.3%, 내년에는 10.2%까지 상승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실업률이 가장 높은 스페인의 경우에는 330억 유로의 정부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올해 5월까지 2만5천 건의 건설사업과 사회복지 분야를 지원해서 50만 개의 신규 일자리를 창출할 계획이다. 또 실직자를 고용하는 기업에 대해 보조금을 지급하고, 자동차 및 건설업체가 고용을 유지할 경우에는 사회보장세 납부기한도 연기해준다.


그러나 미증유의 경제위기에 대한 유럽 차원의 공동대응은 쉽지 않아 보인다. 영국은 경기부양 효과를 높이기 위해 부가세 인하와 재정지출 확대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유로지역 경제의 1/4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지속적인 경상수지 흑자로 그나마 자금여력이 있는 독일은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독일은 자국의 저축률이 높고 향후 경제회복의 가능성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지금 상황에서 재정지출을 늘려도 저축만 늘어날 뿐 소비 진작에는 별다른 효과가 없다는 판단이다.


이러한 불협화음은 동유럽의 위기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드러났다. 지난 3월 1일 동유럽의 경제위기 대응책을 논의한 EU 27개국 정상 긴급회의에서 헝가리의 페렌츠 주르차니 총리는 1천900억 유로의 동유럽 구제금융 특별펀드 조성을 요구했다. 동유럽의 위기가 채무불이행으로 이어진다면 동유럽에 수천억 유로를 투자한 서유럽 은행의 부실로 이어질 것이고, 이는 곧 서유럽 경제에도 직격탄이 되기 때문에 동유럽에 대한 포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메르켈 독일 총리는 각국의 상황이 다르다며 사안별 구제를 주장했고 결국 독일의 입장이 관철되었다.


범유럽 차원의 경제위기 극복이 어려운 까닭은 무엇보다도 경제통합을 위한 조건으로 엄격한 신자유주의 정책기준을 만족시킬 것을 요구하는 유로지역의 이해관계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로지역 국가들 사이에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구제금융 금지조항이 적용되고 있다(마스트리히트 조약은 유럽의 경제통합을 위해서 유럽중앙은행 창설과 단일통화사용의 경제·통화 동맹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EU의 핵심조약이다). 이 조항은 유로화에 참여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신용위기가 발생할 경우 다른 국가에서 지원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이는 방만한 경제 운영으로 발생한 신용위기가 주변국의 피해로 번지는 것을 막는다는 명분이다. 따라서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로지역 국가들은 동유럽에 대한 포괄적 지원 조치가 장래 유로 가입국의 도덕적 해이를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면서 위기 대응의 전면에 나서는데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EU와 유럽중앙은행의 목표 재설정 필요

 


유럽 각국의 조치가 감세·기업지원·실업구제 등 필요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진행되고, 범유럽차원의 대책이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서 현재의 위기를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바라볼 것을 요구하는 사회운동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동아시아 경제위기 이후 10년 동안 금융세계화를 비판해왔던 금융거래과세연합(이하 ATTAC)은 유럽 차원에서 경제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EU의 개혁과 유럽중앙은행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ATTAC은 EU의 리스본조약이 자본이동을 규제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며 해당 조항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리스본조약은 유럽헌법조약이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국민투표에서 부결된 이후, 유럽의 정상들이 모여서 EU의 사회·경제 모델에 대해서 합의한 조약으로 ‘미니 헌법’이라고도 불린다). 자본이동을 규제해야 세금회피나 세금인하 경쟁을 피할 수 있고, 자본도피 위험없이 고용친화적 정책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ATTAC은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2% 이하로 유지하는 것에 맞춰져 있는 유럽중앙은행의 목표가 고용과 정당한 분배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올해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유럽좌파당이 내세운 경제정책에도 유럽중앙은행 문제가 핵심을 차지한다. 경제통합 이후 유럽 시민들은 유럽중앙은행에 대한 어떠한 정치적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 대신 소수의 경제엘리트들이 유럽중앙은행을 좌지우지하면서 보수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완전고용, 사회·생태적 보호에 중심을 두는 새로운 경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유럽중앙은행의 목표와 작동방식이 완전히 변화해야 한다.


이번 경제위기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반성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유럽에서 신자유주의의 집행에 앞장서왔던 EU와 유럽중앙은행의 구성원리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땜질식 처방에 머물고 있는 유럽 각국의 정책이나 보수적인 신자유주의를 고수하는 EU의 대응은 더 이상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지속할 것인지 아니면 대안적인 경제체제를 모색할 것인지가 시험대에 올라 있다.

■독일 프랑크프루트에 위치한 유럽중앙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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