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욱 / 숭실대 철학과 교수

 

폭력은 모두 악인가. 모든 폭력은 비난받아야 하는가. 폭력의 20세기를 지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도처에 만연한 폭력을 목격하고 있다. 이번 기획에서는 다양한 폭력담론을 비교·분석해 봄으로써 폭력의 본질과 영향, 그 메커니즘을 고찰해보고 그것의 정당성과 한계, 대안에 대해 고민해본다. <편집자주>

작년에 우리는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문제를 놓고 촛불시위라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5월 2일 오후부터 교복을 입은 청소년들이 청계천에 모여 시작한 촛불시위는 10월 말에 ‘민생민주국민회의’라는 연대기구를 결성하기까지 한국의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을 사건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 정부는 촛불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불법집회라는 구실로 법적 조치를 취해 생활을 어렵게 만들거나 거액의 벌금을 부과했고, 재판에 회부하기도 했으며 구속하기까지 했다. 이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국가가 과연 법의 이름으로 정당한 권력을 행사하는지, 아니면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을 법의 이름으로 집행하고 있는지를 의문시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폭력문제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가졌던 것은 1960년대였다.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1906~1975)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1906~1975)
그녀의 <폭력론>은 당시 세계적으로 발생한 학생운동, 인권운동, 흑인운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르트르와 파농, 소렐 등은 각기 폭력개념을 전개하며 폭력을 통한 혁명과 변혁의 정당화를 주장했는데, 아렌트는 이들의 폭력개념으로는 사회적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했다. 또한 정치는 폭력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전통적인 개념으로는 정치 현상을 적절하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국가의 법집행, 폭력인가 권력인가


전통적으로 정치와 폭력은 서로 협력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예컨대 막스 베버는 폭력이 정치의 연장이라고 주장했다. <전쟁론>으로 유명한 클라우제비츠는 가장 대규모의 폭력인 전쟁을 정치의 연속이라고도 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정치권력은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으로 이해될 뿐이며, 폭력은 이러한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을 의미한다. 즉 정치권력은 합목적성의 맥락에서 이해될 뿐이며, 그런 한에서 권력이 폭력과 다른 것은 폭력적 행위의 실체는 수단-목적의 범주에 의해 지배받기 때문이다.
밀즈는 “모든 정치는 권력을 위한 투쟁이다”라고 말했다. 베버는 국가에 대해 “적법한 폭력에 기초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고 말했다. 이런 이해는 국가를 조직적인 폭력, 혹은 폭력의 조직체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마오쩌뚱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국가는 폭력을 필수불가결하게 행해야 하며, 폭력이 없다면 국가는 존재할 수 없어야 한다. 과연 국가가 가져야 할 권력이 그런 것일까.
사실상 권력과 폭력은 배타적 관계에 있다. 권력이 극대화된 경우 폭력은 최소화되며, 반대로 폭력이 극대화된 경우에 권력은 최소화된다. 국가가 어떤 명령을 내릴 때 국민이 자발적으로 따른다면 폭력은 전혀 필요하지 않게 되는 반면, 국가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국가는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사용하게 된다. 전자의 경우는 국가 권력이 최대화되어 있는 경우이며, 후자의 경우는 최소화되어 있는 경우이다. 이는 국가권력과 폭력이 동일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 배타적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폭력이란 물리력 또는 사회적 강압을 통해 타인을 제압하여 자신의 의지를 그에게 관철시키는 행위를 의미한다. 폭력은 항상 도구를 필요로 한다. 국가는 총이나 곤봉과 같은 무기를 사용하고 시위대는 화염병이나 돌을 이용한다. 권력이 고도로 작동하는 곳에서는 모두가 한 사람에 대립하여 서있는 형국이며, 폭력이 단적으로 필요한 상황은 한 사람이 모두에 대립하여 서 있는 형국을 하고 있다. 후자의 상황을 유지하는 데는 도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폭력은 때때로 격렬한 분노에서 비롯된다. 눈뜨고 볼 수 없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거나 목격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분노를 터뜨린다. 이 분노에 반대되는 것은 차가운 이성이 아니라 몰이해일 뿐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분노를 억누르거나 없애려는 것은 비인간화를 의미할 뿐이다. 우리가 폭력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이유는 폭력이 문제를 즉각적으로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력이 효과적인 경우는, 마치 정당방위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아주 직접적이고 순간적으로 사용되는 때일 뿐이다. 이런 경우는 폭력도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폭력이 전략적으로, 또 제도적으로 사용될 때 폭력은 그 원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폭력은 다른 정치적 행위(action)와 마찬가지로 예측불가능성을 그 특성으로 가지고 있다. 인간사에 있어서 의도적인 행위가 항상 그 의도에 일치하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는 것처럼, 폭력도 계획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본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폭력은 다른 행위와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즉 폭력은 그 본질상 수단적이기 때문에 폭력을 통해 의도된 목적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폭력 행위에 있어서는 예측불가능성이 그 정당성에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 때문에 어떤 좋은 목적이 폭력적 수단에 의해 산출된다 하더라도, 결국은 그 목적이 수단에 의해 쉽게 압도되어 버리는 것이 폭력이다.

국가의 본질은 권력에 있다


권력이란 사람들이 공동으로 행동하는 데서 형성되며, 권력은 법의 기초가 되고 나아가 국가와 정부기관에 적법성(legitimacy)을 부여한다. 국민들이 법을 준수하고 또 국가의 명령에 따르는 이유는 그 법이 자신들의 동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며, 국가의 명령은 법에 대한 동의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복종은 폭력에 의한 노예적 복종과는 다르다. 정치기구들은 민중권력이 구체화된 것이며, 대의제를 통하여 민중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자들을 지배하게 된다. 따라서 정부의 권력은 그를 지지하는 다수에 기반을 둔 것이다.
정치의 참된 의미는 인간을 ‘정치적 존재’라고 부른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이 말의 의미는 폴리스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인간에게만 특별히 주어진 특징이라는 점, 그리고 조직된 폴리스의 생활은 인간의 공동생활 가운데 최상의 것이며, 여기에는 동물이나 혹은 신들도 갖지 못하는 특별한 인간적인 것이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폴리스에서 산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이처럼 정치는 자유를 중심으로 한다. 이때 자유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 속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과 동료 사이에서 강제력과 강요를 통해서가 아닌, 말을 통해서 더불어 사는 삶의 형식을 마련하는 것이 정치이다. 따라서 정치란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물리적 강제력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국가의 본질은 폭력이 아니라 권력에 있다. 폭력은 본질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폭력은 정당화(justify)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정당화를 필요로 하는 것은 본질이 될 수 없다. 이에 반해 평화, 혹은 권력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다른 것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권력은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정치적 공동체의 실존 자체에 내재한 것이다. “권력은 사람들이 함께 모일 때, 그리고 공동으로 행위할 때 발생한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지만 적법할 수는 없고, 권력은 정당화될 필요가 없지만 적법할 수 있다. 적법성은 과거에, 즉 행위의 시작점에 호소하는 것이고, 정당성은 미래에 놓인 목적과 연관하여 확보된다. 목적이 희미해질수록 폭력의 정당성은 약화되고, 정당방위는 그 목적이 직접적으로 명백한 경우인 것이다.
국가의 근간이 되는 법은 사람들의 ‘함께 함’에서부터 나오는 권력을 기초로 한다. 사람들은 모였다 다시 헤어진다. 하지만 법은 여전히 권위를 갖고 권력 행사의 기초가 된다. 그런 법의 기초가 국민의 권력임은 자명하다. 따라서 이러한 권력을 ‘법형성적 권력’이라 부른다. 법은 바뀔 수 있지만, 법의 기초가 권력이라는 것은 바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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